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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는 쉬지 않고 달려 수많은 언덕을 지나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인 다크우드로 가고 있었다. 산길이 끝난 곳 맞은편에 다크우드 숲길이 펼쳐졌다. 토르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숲 속으로 힘껏 질주해 들어갔다. 발 밑에선 바삭 하고 마른 나뭇잎들이 으스러졌다.
숲 속에 진입하자마자 어둠이 토르를 덮쳤다.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들이 모든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숲 속은 매우 추웠다. 들어선 순간부터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어둠이나 한기 외에도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분명 느껴졌다. 관찰 당하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토르는 고개를 올려 자신의 몸통보다 두껍고 울퉁불퉁한 아주 오래된 나뭇가지들을 둘러봤다. 가지들이 산들바람에 흔들거리며 삐걱댔다. 숲 안으로 열 다섯 걸음 정도 걸어갔을 뿐인데 이상한 동물 울음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봤지만 토르가 들어온 숲의 입구는 이미 시야에서 희미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토르는 주저하고 있었다.
마을 주변으로 다크우드가 존재하는 까닭에 토르에겐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어떤 목동도 도망간 양이 다크우드로 간다면 그 뒤를 쫓지 않았다. 설령 토르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다크우드에 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들려왔고 모두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 예외였다. 토르는 깊게 자리잡은 고정관념들을 무시했고 오히려 주위 깊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 눈 앞에 펼쳐진 인생을 따라가라며 스스로를 한계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숲 속 깊은 곳을 향해 앞으로 걸어갔지만 이내 멈춰 섰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았다. 때마침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도망간 양이 지나가며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토르는 그 흔적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한참 후, 그는 다시 방향을 바꿨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영락없이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신세가 됐다. 기억을 더듬어 돌아온 길을 찾으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뼛속부터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내 계속해서 전진해야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길을 재촉했다.
저 멀리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곳으로 몸을 이끌었다. 작은 빈터였다. 이내 토르는 그 곳 가장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눈 앞에는 푸른색 공단을 길게 늘어뜨린 의복을 입은 한 남자가 토르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토르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존재였다. 바로 마법사였다. 옷에 달린 모자를 쓰고 당당하게 서 있는 그는 세상을 초월한 듯 매우 고요해 보였다.
토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의복 위에 정교하게 금빛으로 장식된 표식만 보아도 보통 마법사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왕실의 문양이었다. 토르는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왕실 마법사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영원의 순간이 흘러간 듯 느껴졌을 때 마법사는 천천히 뒤를 돌아 토르를 마주했다. 토르는 그를 바로 알아봤다.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왕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인물 중 하나, 수 세기 동안 서부 왕국 선대 왕들의 고문 역할을 해온 왕의 직속 마법사, 아르곤. 무엇 때문에 그가 왕실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다크우드 한가운데 와있는지 헤아릴 방법이 없었다. 토르는 혹시 환영을 보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눈빛이 너를 말해주는구나.”
아르곤은 토르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고풍스런 저음이 마치 나무들이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크고 투명한 눈은 마치 토르를 투영하는 듯 보였다. 태양을 마주하는 듯한 강렬한 에너지가 마법사에게서 전해졌다.
토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군, 제가 방해가 됐다면 용서하십시오.”
왕의 고문에게 무례를 범하면 구금되거나 처형된다. 토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마음속에 새긴 불변의 진리였다.
“일어나거라, 얘야. 무릎 꿇길 바랬다면 이미 명령 했겠지.”
토르는 천천히 일어나 마법사를 바라봤다. 아르곤은 토르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이내 멈춰 토르를 주시했고 토르는 이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네 어머니의 눈을 꼭 빼 닮았구나.”
토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나본 적이 없었으며, 아버지 외에 어머니를 아는 사람 또한 만나본 일이 없다. 토르를 낳다 돌아가셨다고 들었고 이로 인해 토르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가족들에게 미움 받는 이유가 어머니의 사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절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전 어머니가 없습니다.”
“진정 그런가?”
아르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머니 없이 아버지 혼자 널 낳았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 오라, 주군, 제 어머니께서는 저를 낳다 돌아가셨습니다.”
“맥클라우드 가의 토르그린. 4형제 중 막내. 선발되지 못한 소년.”
토르는 놀라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르곤 같이 위상이 높은 존재가 자신을 알고 있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사람 외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어떻게 모든걸 알고 계시죠?”
아르곤은 미소를 지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토르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머뭇거리던 토르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제 어머니를 아시죠? 뵌 적이 있나요? 어떤 분인가요?”
아르곤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다시 만난다면 그때 질문하거라.”
어안이 벙벙해진 토르는 마법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혼돈스럽고 신비로운 만남이었다. 아르곤을 이렇게 떠나 보낼 순 없었기에 토르는 곧장 아르곤을 쫓아갔다.
“이곳엔 왜 오신 거죠?”
토르는 아르곤을 붙잡기 위해 서둘러 뛰었지만, 수천 년 된 상아색 지팡이를 쥔 아르곤의 움직임은 믿을 수 없이 빨랐다.
“저를 기다리셨던 건 아니죠?”
“그럼 누구였겠나?”
아르곤을 따라잡기 위해 빈 터를 뒤로하고 숲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지만 왜 저를요? 제가 여기 올걸 어떻게 아셨죠? 제게 무얼 원하시는 거죠?”
“끝이 없는 질문 세례군. 질문만 가득해. 자넨 오히려 들어야 하는데.”
토르는 빽빽한 숲 사이로 계속해서 쫓아가며 최대한 질문을 자제하려 애썼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왔구나. 고결한 노력이야. 허나 애석하게 시간만 낭비할거야. 양은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토르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떻게 아시죠?”
“네가 절대 헤아릴 수 없는 세상을 알고 있단다, 얘야, 적어도 지금은 네가 알 수 없는 것들 말이다.”
마법사의 뒤를 쫓는 내내 의문만이 가득했다.
“넌 내 충고를 듣지 않겠지. 그게 네 천성이야. 고집불통. 네 어머니처럼. 양을 구하겠다고 계속해서 찾아 돌아다닐게 뻔하구나.”
아르곤에게 속마음을 들킨 토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넌 거침없는 소년이란다. 의지가 강해. 당당하고 긍정적이야. 그러나 언젠가는 이로 인해 네가 몰락할 수도 있단다.”
토르는 이끼가 가득한 산등성이로 오르는 아르곤을 계속 뒤쫓았다.
“왕의 부대에 선발되고 싶었지.”
“네! 제게 다시 기회가 올까요? 제게 기회를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아르곤은 웃었다. 저음의 공허한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바람에 토르의 등에 한기가 돋았다.
“원하는 데로 할 수야 있지. 허나 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모두 네가 내리는 선택이 좌우하지.”
토르는 이해하지 못했다.
산마루 꼭대기에 이르러서야 가던 길을 멈춘 아르곤이 토르는 바라봤다.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한 걸음 남짓이었고 아르곤이 발산하는 기운이 너무 강해 토르를 태워버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네 운명은 비범해. 절대 저버리지 말거라.”
토르는 눈을 크게 떴다. 운명? 비범? 덕분에 온 몸이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이해하기 어려워요. 알 수 없는 말씀뿐이에요. 좀 더 말해주세요.”
아르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토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온 사방을 둘러보고 주위의 소리를 살피며 주변을 뒤졌다. 꿈을 꾼 것인가? 환영을 본 것인가?
돌아서서 숲 속을 살폈다. 산마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확실히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 멀리서 움직임이 감지됐다. 소리를 들어보니 잃어버린 양이 분명했다.
이끼가 가득한 산등성이를 내려와 숲 속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내려가는 내내 아르곤을 마주친 일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일어난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수 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이런 곳에 왕의 마법사가 찾아온 것인가? 그는 토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마법사가 언급한 토르의 운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수수께끼를 풀려 하면 할수록 궁금증만 증폭됐다. 아르곤은 토르에게 의문만 잔뜩 심어준 채 질문을 삼가라고 경고했다. 걸어갈수록 뭔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무언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날것만 같았다.
방향을 틀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두 발이 굳어버렸다. 예상했던 악몽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머리끝이 쭈뼛 서며 이곳 다크우드에 오기로 한 결정이 어마어마한 실수라는걸 몸소 깨달았다.
토르의 맞은편, 약 서른 걸음 너머로 시볼드가 보였다. 억센 근육과 흉측한 외모, 말과 비슷한 크기에 네 발로 서있는, 다크우드에서 아니 왕국을 통틀어 가장 무시무시한 짐승이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은 없었지만 전설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자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그보다 크고, 진한 홍색 빛 가죽에 이글거리는 노란 눈을 품은 짐승. 전설에 따르면, 시볼드의 심홍 빛은 무고한 아이들의 피로 물든 것이었다.
평생 동안 이 짐승을 봤다는 얘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있었다면 믿을 수가 없는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했다. 시볼드와 마주쳐 살아남은 사람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일부는 시볼드가 숲의 신이자 흉조라고 믿었다. 왜 흉조라고 여겼는지 당시의 토르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한걸음 물러섰다.
시볼드의 거대한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고 양쪽 송곳니에선 침이 뚝뚝 흘러나왔다. 노란 눈동자는 토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입에 문 것은 다름 아닌 토르의 양이었다. 울부짖으며 뒤집힌 채로 송곳니에 몸이 박혀있었다. 거의 죽은 상태였다. 양이 죽을 때까지 서서히 괴롭히며 고문을 즐긴 모양새였다.
토르는 양의 비명소리를 견딜 수 없었다. 양은 꼼지락거리긴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토르는 죄책감이 들었다.
처음엔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시볼드의 속도는 무엇보다 빨랐다. 도망가는 건 이 짐승을 자극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양이 저런 식으로 죽어가는걸 가만히 지켜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려움에 온 몸이 굳어버렸지만 뭐든 해야 했다.
반사신경이 작용했다. 천천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멩이 하나를 집어 새총에 끼웠다. 떨리는 손으로 새총을 감아 올려 앞으로 나아가 힘껏 쏘았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돌멩이는 적중했다. 명중이었다. 양의 눈을 적중한 돌멩이는 그대로 뼛속까지 파고들어 뇌를 격파했다.
양은 축 쳐졌다. 죽어버렸다. 목숨을 끊어 더 이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덜어줬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죽어버리자 시볼드는 분노의 눈길로 토르를 노려보았다. 서서히 큼지막한 입을 벌려 양을 바닥에 떨궜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양은 바닥에 팽개쳐졌다. 이제 시볼드의 눈에 들어온 건 토르였다.
시볼드의 복부에서부터 사악하고 깊은 으르렁 소리가 들려왔다.
시볼드가 토르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토르는 떨리는 마음으로 돌멩이 하나를 새총에 끼워 다시 한번 조준했다.
재빠르게 뛰어올라 돌진하는 시볼드는 지금껏 토르가 보아온 그 무엇보다 빨랐다. 토르는 앞으로 발을 디뎠고 제발 명중하길 바라며 돌을 던졌다. 다시 한번 돌을 던질 기회 따윈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토르가 던진 돌은 짐승의 오른쪽 눈에 명중해 눈알을 파열시켰다. 몸짓이 작은 동물을 충분히 굴복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그러나 시볼드는 작은 짐승이 아니었다.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상처에 비명을 질렀지만 계속해서 질주했다. 한쪽 눈 만으로도, 심지어 돌멩이가 눈을 파고 뇌리에 박혀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거뜬하게 토르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토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잠시 후 시볼드는 토르의 몸에 올라탔다. 거대한 발톱을 휘둘러 단숨에 토르의 어깨를 찢었다.
토르는 비명을 질러댔다. 칼날 세 개가 살을 베어내는 것 같았고 단숨에 뜨거운 피가 분출했다.
시볼드는 네 발로 토르를 눌러 바닥에 고정시켰다. 코끼리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마냥 무게가 상당했다. 갈비뼈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시볼드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입을 벌려 송곳니를 드러냈다.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토르의 목덜미를 노렸다.
토르는 다가오는 시볼드의 목을 움켜쥐었다. 딱딱한 근육 덩어리를 쥔 느낌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티기에는 힘이 부쳤다. 토르의 팔엔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한 반면, 시볼드의 송곳니는 점차 가까워졌다. 시볼드의 뜨거운 입김이 토르의 얼굴에 전해졌고 목에는 시볼드의 침이 떨어져있었다. 시볼드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토르의 귓가를 에워쌌다. 죽음을 예견한 순간이었다.
토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신이시여. 부디 제게 힘을 내려주소서. 이 짐승을 물리치게 해주소서. 부탁 드립니다. 이렇게 애원합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번 한번만 신세를 질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순간 무언가가 달라졌다. 엄청난 열이 핏줄을 타고 토르의 몸 속에서 솟구쳤고 마치 에너지 장이 그의 온 몸을 활보하는 것만 같았다. 눈을 떠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토르의 손바닥에선 노란빛이 발사되고 있었고 시볼드의 목을 다시 밀어냈을 땐 놀랍게도 짐승과 힘의 세기가 같아져 시볼드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다.
계속된 저항 끝에 결국 시볼드를 밀쳐낼 수 있었다. 힘은 점점 강해졌고 마침내 포탄처럼 강력한 원기가 느껴졌다. 얼마 후 토르는 시볼드를 3미터 밖으로 던져버렸고 시볼드는 등뒤로 나가 떨어졌다.
얼떨떨해진 토르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볼드도 다시 일어섰고 격분한 채 토르를 향해 돌진했다. 토르는 달라진 무언가를 느꼈다. 그의 몸 안에 흐르는 힘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자신을 느꼈다.
시볼드는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그 틈에 토르는 몸을 낮춰 시볼드의 복부를 움켜쥐고 세차게 던졌다. 날아가는 짐승을 보며 알아서 나가 떨어지도록 내버려뒀다.
시볼드는 숲 속으로 날아가 나무에 세게 부딪힌 뒤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지켜보던 토르는 놀라웠다. 방금 전 던져버린 게 진정 시볼드였던가?
시볼드는 눈을 두 번 깜빡인 뒤 토르를 쳐다봤다. 이내 다시 일어나 토르에게 돌진했다.
시볼드가 토르를 덮쳤고 토르는 시볼드의 목을 잡았다. 땅 위에서 뒹굴다 시볼드가 토르 위를 올라탔다. 토르는 다시 몸을 굴려 시볼드 위에 올라탔다. 토르는 양손으로 몸을 위로 일으켜 송곳니로 공격을 시도하는 시볼드의 목을 졸랐다. 그 순간 새로운 힘이 솟구쳤고 더욱 손을 꽉 쥐어 시볼드를 제압했다. 온몸으로 힘을 퍼트리자, 이내 놀랍게도 토르는 시볼드보다 힘이 강해져 있었다.
시볼드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을 졸랐고 마침내 시볼드가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약 일분가량 시볼드의 숨통을 놓을 수 없었다.
토르는 가쁜 숨을 쉬었다. 놀란 눈으로 땅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상처 입은 팔을 감싸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진정 토르가 시볼드를 죽였단 말인가?
수 많은 날들 중에서도 바로 오늘, 토르는 무언의 징조를 느꼈다. 방금 전 무언가 중대한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왕국에서 가장 악명 높고 무시무시한 시볼드를 이제 막 그의 손으로 제압한 후였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었고 무기도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자신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게 무얼 뜻하고, 자신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록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이런 힘을 가진 존재는 오직 마법사들뿐이었다. 그러나 토르의 부모들 중 그 누구도 마법사가 아니었다. 때문에 토르도 마법사일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그가 마법사일 수 있을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아르곤이 죽은 시볼드를 내려보며 서 있었다.
“이곳엔 어떻게 오신 거죠?”
아르곤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 보신 건가요?”
토르는 아르곤과의 만남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어요.”
“넌 잘 알고 있단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식하고 있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그건……갑자기 솟구친 힘이었어요. 저도 모르던 그런 기운이요.”
“에너지 장이란다. 어느 날 모든걸 깨닫게 될 거다. 아마 조정하는 방법도 터득하겠지.”
토르는 어깨를 꽉 움켜 쥐었다. 극심한 통증에 고개를 숙여 손을 보니 피가 흥건했다. 지금 당장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찔했다.
아르곤은 세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어 잡은 토르의 반대편 손을 상처 위에 올렸다. 그대로 손은 얹은 뒤 몸을 뒤로 젖히고 두 눈을 감았다.
상처 입은 팔에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몇 초 뒤, 손위로 흐르던 피가 멈췄고 상처의 고통도 사라졌다.
어깨를 내려다본 토르는 의아했다. 몸이 치유되고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시볼드의 발톱에 긁혀 생긴 세 줄의 흉터뿐이었다. 그것마저도 이미 며칠 전 치료된 흉터처럼 살점이 서로 잘 붙어있었다. 더 이상 피도 흐르지 않았다.
경악한 토르는 아르곤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신 거죠?”
아르곤이 미소 지었다.
“내가 한 게 아니란다, 네가 했지. 난 그저 네 힘을 인도했을 뿐이야.”
“제겐 그런 치유의 능력이 없어요.”
토르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진정 없는가?”
“이해할 수 없어요. 이 모든 게 이해되질 않아요. 부탁이에요, 말씀해주세요.”
토르는 점점 더 초조해지는 자신을 자제할 수 없어 아르곤을 재촉했다..
아르곤은 외면할 뿐이었다.
“세월을 보내며 차차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지.”
토르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 말씀은 제가 왕의 부대에 선발될 수 있다는 건가요?”
토르의 어조는 몹시 흥분돼 있었다.
“그렇죠, 시볼드도 제압했으니 저도 이제 다른 선발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요.”
“물로 그렇고말고.”
“그렇지만 선발 된 건 제 형들이에요. 제가 아니라고요.”
토르는 다시 아르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실버는 이미 한번 저를 거절했어요. 어떻게 해야 제가 선발될 수 있죠?”
“언제부터 전사가 누군가의 초대를 기다리게 된 거지?”
아르곤의 대답이 토르의 가슴 깊이 전해졌다. 덕분에 토르의 몸에 활기가 돋았다.
“그럼 제가 언제든 찾아가도 되는 건가요? 허락 없이도?”
아르곤은 미소 지었다.
“네 운명은 스스로만 좌우할 수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토르가 눈을 깜빡이던 그 순간 아르곤은 또다시 자취를 감췄다.
토르는 곳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이쪽이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눈 앞에 큰 바위가 보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따라 토르는 바위를 올라타 위로 향했다.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갔지만 여전히 아르곤이 보이지 않아 토르는 의아했다.
그곳에서 보니 다크우드 나무들의 뾰족한 윗부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다크우드가 끝나는 지점도 보였고, 두 번째 태양이 짙은 녹색빛으로 저무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왕실로 가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
“저 길에 오르려무나, 그럴만한 용기가 있다면.”
주위를 살펴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울려대는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토르는 분명 아르곤이 주변 어딘가에서 그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아르곤의 말에 동조했다.
토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위 밑으로 내려가 저 멀리 있는 길을 찾아 숲 길을 헤쳐나갔다.
그리고는 운명을 찾아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제 3장
맥길 왕의 성품은 완고했다. 이를 보여주듯 왕의 어깨는 두툼하고 떡 벌어져 있었다. 풍성하게 얼굴을 덮은 잿빛 수염은 왕의 긴 머리카락 같은 색을 띠었고 넓은 이마에는 고뇌의 주름이 가득했다. 왕은 왕실 성벽에 서서 점점 완성 되가는 축제준비를 내려다봤고 왕비가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발 밑으로 펼쳐진 영광스런 맥길 왕의 영토는 시야를 따라 보이지 않는 곳까지 뻗어 나갔고 번성한 도시의 외곽은 고대 돌로 만든 요새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왕궁은 구불구불한 미로 같은 수 많은 거리와 서로 연결돼 있었다. 거리에는 갖가지 석조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각 건물은 전사, 관리인, 말, 실버, 왕의 부대, 친위병, 병사, 무기, 병기 등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됐다. 이 외에도 도시의 성벽 내에 살기를 희망하는 그의 수백 명 백성들이 거리 위에 석조건물로 주거지를 이뤘다. 거리 사이마다 4천 평이 넘는 잔디밭이 펼쳐졌고 그 위로 왕실 정원과 석조광장, 넘치는 분수가 가득했다. 왕실은 수세기 동안 번성해왔다. 맥길 왕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 또 그의 아버지 때부터. 그리고 지금은 그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곳이야말로 링 대륙의 서부왕국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였다.
맥길 왕의 전사들은 지금껏 어느 왕도 누리지 못했던 최고의 기량과 충성심을 자랑했다. 게다가 맥길 왕의 집권 이후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왕국에 침범하지 못했다. 일곱 번째 왕위 계승자 맥길 왕 7세는 32년간 왕국을 통치하며 이롭고 어진 왕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그의 군림 하에 영토는 번성했고 군대의 규모도 두 배로 성장했다. 도시는 번영했고 백성들의 마음엔 인심이 넘쳐났다. 왕에게 불만을 가진 백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맥길 왕은 선대 왕들과 비교해 가장 자비로웠고 그가 왕권을 쥔 이후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평화로워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맥길 왕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은 그의 업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까지 오랜 기간 동안 전쟁 없이 나라를 다스린 적이 없다는 것을. 왕은 머지않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감했다. 그러나 정작 그게 언제이고, 또 누가 침범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가장 큰 위협은 링 대륙 너머에 있었다. 바로 범주 밖의 야만생명체를 다스리고 링 대륙을 에워싸는 협곡 너머의 테두리 땅에서 협곡 밖의 모든 인간을 굴복시킨 미개의 왕국, 와일즈. 지금까지 이어진 맥길 왕족의 집권 동안 야만생명체의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다. 이는 완벽한 원형을 이루는 캐니언 협곡 안에 위치한 왕국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이었다. 두께만 2000미터가 넘는 협곡 덕분에 왕국은 다른 세계로부터 자유로웠다. 뿐만 아니라 초대 맥길 왕 1세가 왕권을 손에 쥐기 시작한 이후부터 왕국의 에너지 장이 활성화되어 원형의 캐니언 협곡에 보호막을 생성했고 덕분에 선대 왕들에겐 야만생명체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야만생명체들이 침입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수 차례 에너지 장을 뚫고 드넓은 캐니언 협곡을 넘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협곡이 에워싸는 링 대륙 안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외부의 위협은 문제될게 없었다.
그렇다고 대륙 내부에 아무런 위험도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덕분에 맥길 왕은 밤새 뜬눈으로 근심에 사로잡혔다. 오늘 열리는 첫째 공주의 결혼식 축제 또한 참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링 대륙 안에서 서부 왕국과 대립하고 있는 적국, 동부 왕국과의 관계를 완화시키고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계획된 결혼식이었다.
양국은 링 대륙의 중앙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하이랜드 산맥을 기점으로 각각 무려 800킬로미터가 넘는 대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이랜드 너머에 위치한 동부 왕국이 링 대륙의 나머지 절반을 통치했다. 동부 왕국은 맥길 왕가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맥클라우드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고 맥클라우드 왕가는 늘 맥길 왕가와 맺은 허술한 평화조약을 깨고 싶어했다. 맥클라우드 왕가는 자신들의 영토가 덜 비옥하다는 생각에 끝없이 불만을 품고 만족하지 못했다. 하이랜드 산맥을 두고도 다툼을 벌였다. 산맥 절반이 맥길 왕가의 영토인데도 불구하고 산맥 전체가 맥클라우드 왕가의 통치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산맥의 경계에서는 끊임없는 접전이 벌어졌고 지속적인 침략의 위협이 가해졌다.
맥길 왕은 이 모든걸 심사숙고 했기에 늘 골치가 아팠다. 서부왕국도 링 대륙 안에서는 캐니언 협곡의 보호를 받아 안전이 보장됐다. 더군다나 협곡의 테두리 안에는 비옥한 토지가 가득했고 다른 위험 요소가 없었다. 왜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만족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맥길 왕의 군대가 전례 없이 막강해졌고 이에 맥클라우드 왕은 감히 전쟁을 벌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맥길 왕은 앞으로 무언가가 곧 일어날것이라는걸 짐작했다. 이 평화도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맥길 왕은 직접 나서 자신의 첫째 공주와 맥클라우드 왕의 첫째 왕자와의 혼례를 주선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이들의 결혼식이었다.
맥길 왕은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저 멀리서 밝은 의복을 입은 수 천명의 시중들이 양쪽 국가에서부터 왕궁 곳곳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광경이 보였다. 링 대륙 안의 모든 사람들이 왕의 요새로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왕의 시중들은 몇 달 동안이나 결혼식 준비에 매달려 최대한 모든 것이 번영하고 강해 보이도록 노력했다. 단순한 결혼식이 아니라 맥클라우드 왕가에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맥길 왕은 도로 위 성벽을 따라 전략적으로 배치된 수백 명의 군사들을 살펴봤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군사를 배치시켰고 이에 만족했다. 맥길 왕이 자랑할만한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근심이 앞섰다.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사소한 시비가 번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어느 한쪽에서든 술에 취해 격해진 마음으로 폭동을 일으키지 않길 기원했다.
그는 경기장 속 마상장으로 시선을 옮겨 곧 있을 각종 경기와 마상 시합 축제가 한창일 모습을 상상해봤다. 매우 치열한 경기가 될 예정이었다. 맥클라우드 왕은 물론 많은 선수들을 대동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마상 시합과 겨루기 및 경기의 승패에는 엄청난 의미가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약간만 어긋나도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폐하?”
손끝에서 따스함이 느껴져 돌아보니 왕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왕비 크레아가 있었다. 왕비는 맥길 왕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며 3남 2녀의 자식을 두었고 지금껏 한번도 왕에게 불평을 해본 일이 없었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의논 상대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맥길 왕은 자신의 왕비가 그 누구보다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자신보다도 말이다.
“오늘은 정치적인 날이에요. 허나 우리 딸의 혼인날이기도 하지요. 생애 한번뿐인 날이에요,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세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을 땐 오히려 걱정이 없었소. 지금은 모든걸 다 가졌고 덕분에 근심만 넘쳐나오. 우리는 안전하지만 내 마음은 불안하오.”
왕비는 크고 자비로운 담갈색 두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두 눈은 마치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담긴 듯 보였다. 두 눈꺼풀은 언제나 아래로 살짝 늘어져 있었다. 아주 조금 생기가 없는 듯 보였지만 탐스럽게 양쪽 얼굴을 감싸며 곧게 늘어진 왕비의 갈색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약간의 흰머리가 보였고 주름이 조금 있었지만 여전히 한창때 모습 그대로 아름다웠다.
“그건 바로 우리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요. 그 어떤 왕도 안전하지 않아요. 폐하께서 상상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첩자들이 성안에 있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왕비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왕에게 입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오늘을 만끽하세요. 우리 딸의 혼례 날이잖아요.”
말을 남기고 왕비는 성벽을 뒤로한 채 자리를 떠났다.
왕은 왕비가 떠나는 걸 지켜본 뒤 고개를 돌려 왕실을 바라봤다. 왕비가 옳았다. 늘 그녀가 옳았다. 왕은 오늘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오늘은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첫째 공주의 혼례 날이었다. 오늘은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여름이 도래하기 전 봄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날이었고, 두 개의 태양 모두 하늘 위를 아름답게 장식했으며 축제의 번잡함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만발했다. 곳곳의 나무들은 분홍빛, 보랏빛, 주황빛, 흰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왕은 당장 내려가 백성들과 함께 딸의 혼례를 축하하고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술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성 밖을 나가려면 끝없이 이어지는 정무를 다 처리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공주의 혼례 당일에는 왕에게도 의무가 주어졌다. 왕은 자문단과의 집회에 참석해야 했고, 자식들의 공식 알현에 응해야 했으며 왕의 알현이 정식으로 허락되는 이날만을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선 수많은 탄원자들을 한 명 한 명 만나야 했다. 운이 좋다면 일몰행사 전에 정무를 마치고 왕실 밖을 나설 수 있을 지도 몰랐다.
*
맥길 왕은 자주색 하의에 금장 허리띠를 두르고 최상의 비단으로 지은 자색과 황금빛의 예복을 걸쳤다. 장막은 순백색이었고 반짝이는 가죽 부츠는 종아리까지 위엄을 더했다. 화려한 금테 한가운데 큼지막한 루비가 빛나는 왕관을 쓰고 뒤로는 시중들을 대동한 채 연회실로 활보했다. 왕은 성큼성큼 걸어 하나의 공간을 지나 다음 공간으로 또 다음 공간으로 이동했고 난간에서부터 궁실로, 다시 고대 양식의 색유리로 하늘 높이까지 장식한 아치형의 복도를 지났다. 마침내 그는 고풍스런 참나무로 만든 문 앞에 이르렀다. 왕이 당도하자 시중들이 앞으로 나서 나무만큼 큰 두께를 자랑하는 문을 열었다. 공식 알현실이었다.
맥길 왕이 입장하자 시중들이 정자세로 그를 맞이했고 왕의 뒤로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앉거라.”
왕은 평소보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곤했다. 특히 오늘같이 끝없는 공식 정무를 돌봐야 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 빨리 처리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왕은 공식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늘 그가 흡족해하는 곳이었다. 천장은 150미터 높이에 이르렀고 한쪽 벽면은 고대 양식의 색유리로 장식됐다. 바닥과 벽면은 30센티가 넘는 두께의 돌로 마감됐다. 백 명 정도의 고관들을 수용해도 끄덕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같이 자문단이 소집된 날엔 단지 왕과 그의 자문단 만이 휑하게 이곳을 채울 뿐이었다. 방을 차지한 건 크기가 어마어마한 반원형 테이블이었고 그 뒤로 자문단이 서 있었다.
입구를 지나 알현실 한가운데를 거쳐 왕좌로 향했다. 왕은 돌계단을 오르고 좌우로 놓인 황금 사자조각을 지나 황금으로 만든 왕좌를 장식한 붉은색 벨벳 쿠션 위에 자리했다. 왕의 선왕과 그 왕의 선왕을 포함해 맥길 왕가의 모든 왕들이 이 자리를 거쳤다. 맥길 왕은 착석하며 선왕들의 중압감을 느꼈다.
왕은 모든 자문단이 참석했는지 살폈다. 명장이자 총 사령 고문관인 브롬, 왕의 부대 사령관 콜크, 가장 연장자인 학자 겸 사학자에 무려 3대 선왕들의 고문관을 지닌 아버톨, 마르고 작은 체구에 머리는 희고 눈은 초점 없이 흔들리는 왕실 내무총관 펄스. 왕은 펄스를 불신했고 내무총관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펄스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 모두 왕실 내무총관을 수행했기에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펄스를 이 자리에 앉혔다. 왕의 재무관 오웬, 외무총관 브레데이, 세무총관 어난, 대중 고문관 두웨인, 귀족 대표 켈빈.
두말할 것도 없이 왕은 절대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왕국은 자유주의를 추구했고 선대 왕들 또한 모든 정무에 대표단을 대동시켜 그들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왕권과 귀족 사이에 놓인 불안한 권력 줄다리기 역할을 했다. 지금은 조화를 잘 이루고 있지만 이전에는 귀족과 왕권 사이에 엄청난 권력투쟁이 오갔다. 덕분에 서로가 성장하는 계기가 갖춰졌다.
맥길 왕은 한 명의 불참자를 확인했다. 바로 왕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던 인물, 아르곤이었다. 아르곤의 참석여부는 언제나 미지수였다. 이에 맥길 왕은 격분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엔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왕에게 마법사들이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르곤의 불참에 맥길 왕은 더욱 조급해졌다. 결혼식이 진행되기 전에 눈 앞에 산처럼 쌓인 모든 정무를 빨리 처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문단들은 반원형 탁자에 둘러 앉아 왕을 알현했다. 서로간 약 3미터씩 거리를 두었고 모두 정교하게 조각된 팔걸이가 마련된 고풍스런 참나무 의자에 앉아있었다.
“폐하, 말씀을 허락해 주시지요.”
오웬이 청을 올렸다.
“말하거라. 간략하게. 시간이 없구나.”
“공주님께서는 진귀한 진상 품을 가득 받으실 겁니다, 저희 모두 금고가 가득 차도록 많이 받으시길 염원하고요. 수 천명의 백성들이 찬사를 보내고 개인적으로 진상 품을 올릴 것입니다. 상점과 주점이 백성들로 가득하고 이 덕에 저희들의 금고도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축제를 마련하느라 왕실의 재력이 대폭 감소했습니다. 백성들과 귀족들의 세금을 좀 더 걷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특별 세금을 물려 식을 치르느라 입은 손실을 만회하시길 청하옵니다.”
맥길 왕은 재무총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근심을 읽었다. 감소한 재정을 생각하니 왕의 배가 힘없이 꺼졌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세금부담은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재물이 적은 채로 민심을 살피는 게 바람직하지 않소. 백성들의 행복이 우리의 재물이오. 더 이상의 증세는 없을 것이오.”
“그러나 폐하, 이제 더 이상……”
“이미 결정을 내렸소. 다른 안건은 무엇이오?”
오웬은 침울함에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폐하.”
브롬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오늘 행사를 위해 병력을 총 동원 했습니다. 저희의 군사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전투력이 이곳에 집중돼, 만일 왕국 외부에서 침입이 일어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적들에게 축제의 만찬을 제공하는 한 공격은 없을 것이오.”
브롬은 웃었다.
“하이랜드 산지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소?”
“몇 주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동부왕국은 모든 병력을 혼례 준비에 사용한 것 같습니다. 어쩜 이미 평화로운 관계를 준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맥길 왕은 수긍하기 힘들었다.
“혼례를 주선한 게 효과가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거겠지. 자네 생각도 그러하지?”
맥길 왕은 아버톨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버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하는 순간 목소리가 갈라졌다.
“폐하, 폐하의 선왕, 그리고 선왕의 선왕께서도 맥클라우드 왕가를 신뢰하지 못하셨습니다. 단지 지금 몸을 낮추고 있다 해서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는 장담드릴 수 없습니다.”
맥길 왕은 그의 의견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부대는 어떻게 되어가나?”
왕은 콜크에게 물었다.
“오늘 신병들 환영 식을 열었습니다.”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콜크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