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웬 공주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공주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이 순간 아버지가 함께라는걸 느꼈다. 공주는 서둘러 레드우드를 향해, 나무에 둘러 쌓인 호수를 향해, 자신의 슬픔을 들어줄 호수를 향해 달렸다.
*
그웬 공주는 슬픔의 호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무릎 밑 바닥에는 호수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싼 솔방울들이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 공주의 시선은 고요한 호수에 멈춰 있었다. 지금껏 보안 온 호수 중에서 가장 고요한 호수였다. 고요한 호수는 그 한가운데에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달빛을 담고 있었다. 원형의 호수에는 이제 막 뜨기 시작한 달 뿐만 아니라 저무는 태양이 함께 드리워져 있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뜨고 지는 달과 태양이 하나의 호수 안에 머물러 있었다. 공주는 지금 이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신성한 기운을 느꼈다. 마치 하루가 저물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창과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신성한 기운이 펼쳐진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신성한 곳에서, 모든 게 가능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공주는 그렇게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성심 성의껏 간절히 기도했다. 지난 며칠 동안 일어난 일은 공주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찼다. 공주는 그로 인한 고충을 모두 쏟아냈다. 고드프리 왕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토르를 위해서도 모든 걸 걸고 기도했다. 두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을 잃고 혼자서 개리스 왕과 맞서야 하는 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공주는 또한 반인 반수와 혼인을 올리게 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공주는 삶이 철저히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궁금증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어쩌면 답이 아니라, 삶을 버틸 희망이 필요했다.
맥길 왕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호수의 신, 숲의 신, 산의 신, 바람의 신 등 다양한 신들에게 소원을 빌었다. 그러나 그웬 공주는 그러한 신들을 모두 부정했다. 공주를 토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왕국의 믿음을 믿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 속에 속했다. 공주는 이런 수많은 신이 아닌,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신을 믿었다. 그리고 지금 공주는 그 절대적인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부탁 드립니다, 신이시여. 공주가 기도를 올렸다. 토르가 제게 돌아오게 해주세요. 전쟁에서 안전하게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무사히 매복을 피하게 해주십시오. 고드프리 오빠를 살려주세요. 그리고 저를 지켜주세요. 그 누구도 저를 이곳에서 멀리 보내 반인 반수와 결혼하게 만들게 하지 말아주세요.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제게 신호를 보여주세요. 제게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려주세요.
그웬 공주는 레드우드의 높이 뻗은 울창한 소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공주는 머리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실랑이는 나뭇가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 앞에선 소나무의 솔잎들이 바람을 타고 호수 위로 내려 앉았다.
“소원을 빌 때는 신중해야 하네.” 누군가가 공주에게 말을 걸었다.
공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공주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에 공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몹시 놀라긴 했지만 공주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공주는 그가 누군지 이내 알아차렸다. 오래된 깊은 목소리, 나무들보다 오래된 목소리, 이 지구보다 오래된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잘 아는 공주는 순간 가슴이 벅차 올랐다.
공주는 흰색 망토와 망토에 붙어있는 후드를 눌러쓰고 곁에 서 있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두 눈은 마치 공주의 영혼을 뚫을 듯한 기세로 이글거리며 공주를 마주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지팡이의 끝은 지는 태양과 떠오르는 달을 향하고 있었다.
이르곤이었다.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르곤을 마주했다.
“찾았었어요.” 공주가 말했다. “오두막에 갔었어요. 제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셨나요?”
“난 모든걸 듣는다네.” 아르곤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공주는 그러한 아르곤의 모습에 잠시 말을 멈추고 의아해했다. 아르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주세요.” 공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부탁이에요, 토르가 죽지 않게 해주세요. 토르가 죽게 내버려둬선 안돼요!”
공주는 앞으로 다가가 아르곤의 손목을 잡고 애원했다. 그러나 공주가 아르곤의 팔목을 잡자 그의 손목이 불타는 듯 뜨겁게 달아올랐고 공주는 아르곤의 에너지에 압도당하며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아르곤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고래를 돌려 호수 쪽으로 몇 걸음 발길을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서있을 뿐이었다. 그의 두 눈이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공주는 아르곤 곁에 다가가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다. 아르곤이 다시 말을 건넬 때까지 숨죽이며 기다렸다.
“운명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단다.” 아르곤이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그러길 애원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대가가 따르지. 공주는 생명을 구하길 원하는구나. 고귀한 노력이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숨을 모두 구할 수는 없네. 선택을 해야 한단다.”
아르곤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봤다.
“오늘밤, 토르를 구하겠느냐, 아니면 네 오빠를 구하겠느냐?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게 된단다. 운명이지.”
아르곤의 질문은 공주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런 선택이 어디 있죠?” 공주가 반문했다. “한 사람을 구하려면, 한 사람을 저버려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단다.” 아르곤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모두 죽을 운명이란다. 애석하구나.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마치 칼날이 공주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었다. 두 사람이 모두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운명이 정말로 그렇게 잔인한 것이던가?
“두 사람을 두고 한 사람을 고를 순 없어요.” 마침내 공주가 힘없이 대답했다. “물론 토르를 향한 사람이 오빠에 대한 마음보다 강해요. 그렇지만 고드프리 왕자는 제 혈육이고 오빠에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의 목숨을 저버리는 선택은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제가 이런 선택을 하는 걸 원치 않을 거에요.”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 죽겠구나.” 아르곤이 대답했다.
그웬 공주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잠시만요!” 공주가 돌아서는 아르곤을 멈춰 세웠다.
아르곤은 다시 몸을 돌려 공주를 마주했다.
“저는 어때요?” 공주가 물었다. “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대가로 제가 죽으면요? 가능한가요? 두 사람을 모두 살리고 제가 죽으면 안 될까요?”
아르곤은 공주의 진심을 판독이라도 하는 듯 아주 오랜 시간 공주를 바라봤다.
“진심이구나.” 아르곤이 대답해다. “맥길 왕가에서 가장 진심이 담긴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네 아버지가 옳은 선택을 했구나. 그랬지, 그분은 그랬었지…”
아르곤은 계속해서 공주를 바라보며 차츰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아르곤의 시선이 불편하긴 했지만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공주의 선택으로 인해, 공주의 희생으로 인해.” 아르곤이 말을 이었다. “운명이 공주의 염원에 귀를 기울였다. 토르는 오늘밤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공주의 혈육도. 공주 또한 살 것이다. 그러나 공주의 남은 수명 중 일부분은 사라지게 된다. 기억하거라, 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대신 공주가 살아갈 삶의 일부분이 죽게 된단다.”
“그게 무슨 뜻이죠?” 공주가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지.” 아르곤이 대답했다. “공주는 선택을 내렸다. 그 선택을 다시 물리겠느냐?”
그웬 공주는 단단히 다짐했다.
“토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공주가 대답했다. “그리고 제 가족을 위해서도요.”
아르곤은 공주의 눈을 뚫어지도록 바라봤다.
“토르는 대단한 운명을 타고 났단다.” 아르곤이 설명했다. “그러나 운명은 바뀌기도 하지. 우리의 운명은 별들과 같아. 그럼에도 운명은 신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지. 신은 운명을 바꿀 수 있단다. 토르는 오늘밤 죽을 운명이었다. 공주가 아니었다면 토르는 오늘 죽었을 거야. 그리고 이를 막은 대가는 공주가 치르게 됐구나. 가혹한 대가지.”
공주는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공주가 아르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순간 눈앞에서 밝은 빛이 환하게 일어났고 그와 함께 예고도 없이 아르곤이 자취를 감췄다.
깜짝 놀란 그웬 공주는 호수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주변은 매우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할 뿐이었다. 공주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뒤 저 멀리 하늘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감사했다. 마침내 공주는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미래에 있을 끔직한 무언가를 마음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들을 애써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그런 생각 속에 사로잡혔다. 과연 토르를 구하는 조건으로 공주가 치를 대가가 무엇이란 말인가?
제8장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토르는 적군들에 짓눌리며 꼼짝도 못한 채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속수 무책으로 누워 있었고 동시에 주변으로 울리는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말들의 울음소리, 이곳 저곳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어느덧 태양이 저물며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름달이었다. 그 어느 때 본 보름달보다 크고 둥근 보름달이었다. 토르의 시야에 들어온 보름달은 거구의 적군이 토르의 눈 앞에 다가서자 시야가 가리워져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고 적군은 토르의 마지막을 장식할 기세로 삼지창을 들어올렸다. 토르는 죽음의 순간이 드리웠음을 깨달았다.
토르는 다가올 죽음을 맞이하며 눈을 감았다. 두렵지 않았다. 후회만 있을 뿐이었다. 토르는 좀 더 살고 싶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었고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 밝히고 싶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웬 공주와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이렇게 죽는 게 억울했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죽어서는 안됐다. 토르는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었다.
순간 토르는 몸 속에서 어떠한 힘이 발현되는 걸 느꼈다. 맹렬함이었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강력한 기운이었다. 새로운 힘이 발현되자 온 몸이 움찔거렸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발끝에서부터 다리, 허리 그리고 양 팔과 손끝까지 엄청난 에너지로 온몸이 타올랐고 알 수 없는 기운이 일어나며 빛을 발했다. 마치 땅 속에서 용이 승천하는 듯이 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포효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토르는 자신을 붙잡고 짓누르는 적군들을 뿌리치며 바닥에서 일어났고 자신의 힘이 웬만한 병사 열 명보다 더 강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눈 앞에 선 적군은 삼지창을 내리 꽂았고 토르는 앞으로 다가가 그의 투구를 쥐고 박치기를 해 적군의 코를 부러뜨렸다. 토르가 적군을 다시 발로 힘껏 차버리자 적군은 마치 포탄처럼 저 멀리 날아가며 등 뒤로 적군의 병사들을 열 명이나 말에서 떨어뜨렸다.
토르는 기존에 느껴보지 못했던 분노를 느끼며 병사 한 명을 들어 올려 다른 병사들이 있는 곳에 힘껏 집어 던졌고 그때마다 상대편 병사들 수십 명이 볼링 핀처럼 다 함께 쓰러졌다. 토르는 다시 공격해오는 병사가 들고 있던 약 3미터 길이의 쇠사슬을 낚아채 머리 위로 쇠사슬을 돌리며 적들을 쓰러뜨렸다. 토르 주변으로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일어났고 반경 3미터 내에 있던 수십 명의 병사들이 토르의 공격에 일제히 쓰러졌다.
몸 속에 흐르는 기운은 계속해서 강해졌고 토르는 뿜어 나오는 에너지를 거침없이 분출했다. 여러 명의 병사들이 토르를 향해 돌진하자 토르는 그들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손바닥이 욱신거렸고 이내 토르이 손바닥에선 차가운 안개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돌진하던 병사들은 눈 앞에 펼쳐진 얼음 장벽 앞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얼음 장벽에 길이 막혀 그대로 그 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토르는 양 손을 뻗어 적군들을 향해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러자 적군들이 모두 얼음 속에 갇혀 버렸다. 마치 전쟁터 바로 위로 얼음이 내려앉은 듯한 형상이었다.
토르는 서둘러 부대원들을 살폈다. 때마침 상대편 병사들이 리스 왕자, 오코너, 엘덴, 쌍둥이들을 향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토르는 손바닥을 펼쳐 적군들을 얼렸고 죽음의 위기에서 부대원들을 구했다. 부대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토르를 향한 그들의 시선엔 안도감과 감사함이 담겨 있었다.
맥클라우드 병사들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토르를 더욱 경계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토르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거리를 뒀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얼어붙은 모습에 저마다 토르에게 가까이 가기를 꺼렸다.
그러나 어디선가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웬만한 병사들보다 체구가 다섯 배는 커 보이는 한 병사가 토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키가 4미터는 되어 보였고 토르가 지금껏 본 검들 중 가장 큰 검을 쥐고 있었다. 토르는 돌진하는 병사를 얼리기 위해 손바닥을 들었다. 그러나 그 병사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토르가 내뿜는 에너지가 마치 귀찮은 모기라도 되는 듯 손으로 토르의 에너지를 치워버리고 계속해서 토르에게 돌진했다. 토르는 자신의 힘이 아직 불완전 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왜 자신의 힘이 상대편 적군을 쓰러뜨리기에 부족한지 원인을 알 수 없어 당황했다.
거구의 적군은 순식간에 토르에게 달려왔다. 그의 엄청난 속도에 토르는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토르의 뒷덜미를 잡아 토르를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토르는 바닥에 세차게 떨어졌다. 게다가 몸을 일으킬 틈도 주지 않고 거구의 적군은 이미 토르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는 양 손으로 토르를 들어올려 시선을 맞췄다. 이내 거구의 적군은 다시 토르를 공중으로 높이 집어 던졌고 맥클라우드 병사들은 이를 지켜보며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토르는 그대로 60미터를 날아올라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갈비뼈가 부서지는 고통이 전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구의 적군이 다시 토르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이제 토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토르에게 솟아나던 힘은 모두 소진 된 상태였다.
토르는 두 눈을 감았다.
부탁 드립니다, 신이시여, 도와주세요.
거구의 적군이 토르 위에 올라타자 토르는 마음 속에서 무언의 떨림이 계속해서 자라나는 걸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떨림은 토르의 몸 밖으로 나와 우주 전체에 퍼졌다. 토르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어느덧 스스로가 모든 사물과 조화되는 걸 느꼈다. 공기의 구조와 나무의 흔들림과 풀잎이 흔들리는 움직임까지 우주의 모든 것에 토르가 동화되어 있었다. 모든 사물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토르는 손을 뻗어 온 세계의, 우주의 모든 떨림을 불러 일으켰다.
감았던 두 눈을 뜬 토르의 귓가에 어마어마한 윙윙거림이 들렸다. 놀랍게도 토르의 손을 향해 거대한 벌떼가 곳곳에서 모여들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벌떼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고 토르가 손을 더 높이 들자 벌떼들이 토르의 손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토르는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알 수 없었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벌떼를 조종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토르는 거구의 적군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엄청난 벌떼들이 하늘을 덮으며 어둠이 일었고 순식간에 모든 벌떼들이 거구의 적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구의 적군은 양 손을 머리위로 들어 올리며 벌떼들을 휘저었다. 엄청난 벌떼들이 그에게 계속해서 달려들었고 쉬지 않고 벌침을 쏘아댔다. 수천만 마리의 벌에 쏘인 거구의 적군은 결국, 두 무릎을 땅에 꿇고 바닥에 얼굴을 떨구고 죽어버렸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자 주변이 크게 울렸다.
토르는 다시 말에 올라 놀란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맥클라우드 병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토르가 그들을 향해 손을 뻗자 엄청난 벌떼들이 일제히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맥클라우드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수도 없이 쏘아대는 벌떼의 공격을 맞으며 도망갔다. 맥클라우드 병사들이 번개처럼 허겁지겁 도망가자 전쟁터는 순식간에 비어지고 있었다. 일부 병사들은 도망가지 못하고 벌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바닥 위에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계속해서 도망갔고 벌떼들을 그들을 공격하며 계속해서 따라갔다. 엄청난 윙윙 소리가 지평선 너머로 도망치는 군대의 말발굽 소리와 벌에 쏘인 병사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토르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단 몇 분만에 전쟁터의 병사들이 사라져버렸다. 남아있는 병사들이라고는 시체로 남은 병사들과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병사들뿐이었다. 토르는 고개를 돌려 친구들을 살폈다.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거친 숨을 내뿜고 있었다.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온 몸에 멍이 들고 이리저리 가벼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생명에 지장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토르와 안면이 없던 부대원 3명은 바닥에 누워 시체가 되어 있었다.
저 멀리서 우르릉거리는 거대한 소리가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맥길 왕가의 군대가 언덕을 오르며 토르 일행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캔드릭 왕자가 보였다. 토르 일행을 구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온 군대는 순식간에 토르와 부대원들 앞에 멈춰 섰다. 전쟁을 뒤로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들 앞에 맥길 왕가의 군대가 달려왔다.
토르는 놀란 눈으로 말에서 내려 토를 향해 달려오는 캔드릭 왕자와 콜크 사령관과 브롬 총 사령관을 바라봤다. 이들 뒤로는 왕실의 명예로운 실버 전사들이 함께였고 모두 말에서 내려 토르에게 다가왔다. 모두가 일제히 유혈 사태가 벌어진 전쟁을 치른 뒤 승리를 거머쥔 토르 일행을 바라봤다. 부대원들 뒤로 수백 명의 맥클라우드 병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모습에 모두가 의아한 모습이었다. 토르는 그들의 눈빛에서 궁금증과 경외감과 존경심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의 눈빛 속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한 평생 토르가 꿈꿔왔던 것이었다.
토르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제 9장
에레크 명장은 남쪽 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렸다. 명장은 전 속력으로 말을 달리며 어둠 속에서 말이 웅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알리스테어가 노예상에게 팔려가 발러스터로 끌려간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었다. 명장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여관 주인을 믿었던 자신이 너무 어리석고 순진했다. 여관 주인이 약속을 어길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도 못했다. 명장이 마상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나면 약속대로 알리스테어에게 자유를 줄 거라 생각했다. 언제나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다해온 명장이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자신의 말을 지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명장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를 그가 아닌 알리스테어가 치르고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자 에레크 명장은 구멍이 뚫린 듯 가슴이 아파왔다. 명장은 더욱 힘차게 말을 달렸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이 여관에서 일하는 불명예를 겪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노예상에게 성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생각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에 대한 책임이 바로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녀의 인생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여관 주인에게 제안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여관 주인은 이 모든 일을 벌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깊은 밤 에레크 명장은 알리스테어를 찾아 빠르게 질주했다. 말이 질주하며 일으키는 말발굽 소리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며 달리는 말의 호흡소리가 명장의 귓가에 가득 울렸다. 말 또한 명장처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명장도 힘에 부쳐 말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명장은 마상 경기 직후 한시도 쉬지 않고 바로 여관으로 향했고 이제는 더 이상 지칠 수도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더 이상의 기력이 남아있지 않아 달리는 말 위에 고삐를 붙들고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명장은 서서히 감기는 눈을 애써 부릅뜨며, 잠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명장은 보름달 쏟아지는 달빛을 흠뻑 받으며 발러스터가 있는 남쪽으로 질주했다.
에레크 명장은 어린 시절부터 발러스터라는 곳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비록 한번도 직접 방문한 적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은 도박과 마약과 성 매매 등 왕국의 온갖 부도덕한 일들이 팽배하게 이뤄지는 곳이었다. 그곳은 링 대륙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알려진 모든 종류의 어두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곳은 에레크 명장의 성품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명장은 한번도 도박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고 술에 취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여유가 생길 때면 언제나 훈련에 매진하여 전사로서의 기질을 갈고 닦았다. 명장으로서는 발러스터를 찾아가는 유형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나태하게 삶을 보내고 환락을 품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발러스터에 가는 것 자체가 불길한 징조였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 곳으로 향하는 알리스테어 생각에 명장은 가슴이 메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구해야 했다. 발러스터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기 전에 속히 그녀를 그곳에서 빼내와야 했다.
달은 점차 기울어졌고 어느새 달리던 길이 넓어지기 시작하며 말을 달리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에레크 명장은 눈 앞에 펼쳐진 도시를 바라봤다. 수도 없이 많은 횃불이 벽에 걸린 모습이 마치 도시 전체가 어둠 속을 밝히는 모닥불처럼 보였다. 예상했던 모습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발러스터에 머무는 사람들은 밤새 향락에 빠져 잠을 자지 않는다고 했다.
명장은 더욱 박차를 가해 달렸고 눈 앞의 도시가 더욱 가까워지며 마침내 작은 목재 다리를 건넜다. 다리의 양 옆으로 횃불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고 다리를 지키는 보초는 잠에 취해 꾸뻑거렸다. 에레크 명장이 번개처럼 다리를 건너가자 졸던 보초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 몸을 일으켰다. 보초는 에레크 명장을 불러 세우기 위해 소리쳤다. “이봐!”
그러나 명장은 멈추기는커녕 속도를 줄이지도 않았다. 보초가 용기를 내 에레크 명장을 쫓아올 일도 없었을 테지만 만약 그랬다면 에레크 명장은 자신의 길을 막는 보초를 죽일 생각이었다.
명장은 계속해서 달려 도시로 진입하는 입구에 들어섰다. 입구는 사각형 모양을 띠고 있었고 가장자리는 고대의 석조 벽면으로 이뤄져 있었다. 명장은 그대로 입구를 지나 좁게 난 길가로 들어섰다. 길의 양 옆으로 횃불이 늘어서 어둠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도시 내부에 빽빽이 줄지어 선 건물들 덕분에 도시 내부는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거리 위의 사람들은 모두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서로 몸을 부딪혔다. 거대한 파티가 벌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건물마다 여관과 도박장이 보였다.
에레크 명장은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알리스테어가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걸 확신했다. 명장은 자신이 너무 늦게 도착한 게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침을 삼켰다.
명장은 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남다르게 큰 규모를 자랑하는 여관 앞까지 말을 타고 달렸다. 여관 앞에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있었다. 명장은 이곳부터 수색해보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서둘러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술에 취해 소란을 떠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여관 주인을 찾았다. 여관 주인은 실내 한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그들에게서 돈을 받은 뒤 그들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러던 중 에레크 명장과 눈이 마주친 여관 주인은 명장에게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을 드릴까요, 손님?” 여관 주인이 물었다. “아니면 찾는 계집이 있으신가요?”
명장은 고개를 저으며 소란 속에서 여관 주인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여관 주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을 찾고 있네.” 명장이 대답했다. “노예상이오. 그자는 사바리아에서 이곳으로 왔네. 아마 이곳에 온지 하루 정도 됐을 거네. 값 나가는 화물을 가지고 왔네. 노예들을 태운.”
여관 주인은 입술을 핥았다.
“손님께서 원하시는 건 아주 귀한 정보입니다.” 여관 주인이 답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어요. 방을 제공하는 것만큼 제겐 쉬운 일이죠.”
여관 주인은 앞으로 바짝 다가와 손가락을 비비며 명장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는 명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고 입가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에레크 명장은 여관 주인이 역겨웠지만 정보를 얻어야 했다. 또한 일분 일초를 지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주머니에 손을 넣어 커다란 금화를 꺼내 여관 주인에게 건넸다.
금화를 이리저리 살피던 여관 주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왕의 금화군요.” 여관 주인이 여전히 금화를 살피며 감탄을 자아냈다.
여관 주인은 호기심과 존경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명장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럼 왕실에서 여기까지 말을 타고 달려오신 건가요?” 여관 주인이 물었다.
“질문은 됐네.” 에레크 명장이 대답했다. “질문은 내가 했네. 그리고 대가도 치렀네. 이제 대답해보게. 노예상은 어디 있나?”
여관 주인은 입술을 여러 번 핥더니 명장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 사람은 엘봇이라고 합니다. 이 도시에 새로운 창녀들을 데리고 일주일에 한번씩 방문하지요. 창녀들을 경매에 붙여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에게 팔아버립니다. 놈의 소굴로 가면 놈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길이 끝날 때까지 쭉 따라가면 그곳에 놈의 영업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찾는 계집이 꽤 괜찮은 계집이라면, 아마도 벌써 팔리고 없을 겁니다. 엘봇이 데려오는 창녀들은 모두 금새 팔려버리니까요.”
에레크 명장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순간, 기분 나쁘게 축축한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놀랍게도 여관 주인이 겁도 없이 명장을 잡아 세우고 있었다.
“만약 창녀를 찾으시는 거라면, 제가 데리고 있는 애들은 어떠십니까? 여기 계집들도 그가 데리고 오는 계집만큼 훌륭합니다. 그러나 가격은 절반에 불과하죠.”
에레크 명장은 여관주인이 역겨웠다. 만약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여관 주인을 죽여 없애버렸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악한 자를 한 명이라도 더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명장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여관 주인은 그런 수고조차 필요 없는 인간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자신을 잡은 여관 주인의 손을 뿌리치고 그에게 가까이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한번 내게 손을 대면,” 에레크 명장이 경고했다. “그럼, 그 행동을 후회하게 해주겠다. 알겠으면 뒤로 두 걸을 물러서라. 내가 이곳에서 내 손에 들린 이 검을 휘두르기 전에.”
여관 주인은 흠칫 놀라 공포에 젖은 눈빛으로 고개를 풀 숙이고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에레스 명장은 지체 없이 그곳을 빠져 나왔다. 앞을 막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밖으로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명장은 술 취한 주정쟁이들이 이리저리 옆을 기웃거리며 탐을 내고 있던 자신의 말에 달려가 올라탔다. 의심의 여지 없이 주정쟁이들이 자신의 말을 훔치려고 했던 게 분명했다. 만약 그들이 말을 훔쳐가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지를 생각하니 끔찍했다. 명장은 앞으로는 말을 더욱 단단히 메어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에레크 명장은 범죄와 부패가 팽배한 이 도시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명장의 애마, 와크핀은 훌륭한 군마였다. 누구든지 와크핀에게 접근해 데려가려 한다면 와크핀이 그 자리에서 그 자를 밟아 죽일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와크핀에게 힘껏 발길질을 했고 명장과 와크핀은 좁은 길을 따라 달려 나갔다. 명장은 북적 이는 인파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렸다. 아주 늦은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에는 더욱 많은 인파가 모여들며 서로 몸을 부대끼고 있었다. 명장이 빠르게 달려나가자 몇몇 주정쟁이들이 명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명장은 개의치 않았다. 알리스테어가 근방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그녀를 되찾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마침내 석조 벽이 길 앞을 가로막으며 막다른 골목임을 알렸다. 오른쪽에 위치한 가장 마지막 건물은 기울어진 여관이었다. 하얀 벽토가 발린 건물에 초가 지붕을 이고 있는 한물간 건물이었다. 그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한 명장은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말에서 내린 명장은 말뚝에 단단히 말을 고정시킨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눈앞의 모습에 놀라 이내 가던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내부는 아주 어두웠다. 커다란 방에는 꺼져가는 횃불 몇 개만이 어둠을 겨우 밝히고 있었고 저 멀리 한쪽 구석에는 불이 제대로 붙지 않은 벽난로가 켜져 있었다. 곳곳에 깔린 이불 위에는 수 많은 여자들이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도 못한 채 두꺼운 밧줄에 몸이 묶여 벽에 고정돼 있었다. 여자들이 모두 약에 취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부는 아편 냄새가 진동을 했고 이곳 저곳에서 아편을 피운 파이프가 서로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고급스럽게 옷을 차려있은 남자 몇 명이 방안을 돌아다니며 이불 위에 널브러진 여자들의 다리를 발로 툭툭 건드려봤다. 마치 어떤 물건을 살지 물건을 고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작은 붉은색 벨벳 의자 위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명주 가운을 두른 그는 양 옆으로 여자들을 사슬에 묶어 대동하고 있었고 그의 뒤로는 엄청난 거구의 근육질을 자랑하는 사내들이 있었다. 사내들의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했고 모두가 에레크 명장보다 키가 크고 체격이 컸으며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해치우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을 살핀 에레크 명장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바로 짐작했다. 다름 아닌 성 매매 장소였다. 이곳에 있는 여자들은 자신을 사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저 구석에 앉아있는 남자가 바로 알리스테어를 데려간 우두머리인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는 알리스테어 외에도 여기 있는 모든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 왔을 것이다. 어쩌면 알리스테어가 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명장은 서둘러 여자들이 늘어선 방 안을 둘러보며 여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방 안에는 수실명의 여자들이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방 안이 너무 어두워 얼굴을 식별하기가 힘들었다. 명장은 통로를 따라가며 한 사람씩 얼굴을 살폈다. 순간 누군가가 손바닥으로 명장의 가슴을 쳤다.
“돈은 냈소?” 거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구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명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를 구경하고 싶으면, 돈을 내시오.” 사내는 중 저음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의 규칙이오.”
명장은 분노가 솟구쳤다. 거구의 사내가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명장은 어느새 손 끝으로 사내의 목젖을 가격했다.
사내는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 않아 양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명장은 앞으로 다가가 팔꿈치로 사내의 관자놀이를 가격했고 사내는 그대로 얼굴을 바닥에 떨구며 기절했다.
명장은 다시 방안에 있는 여자들의 얼굴을 살피며 간절하게 알리스테어를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알리스테어는 이곳에 없었다.
에레크 명장은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한쪽 구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우두머리를 향해 서둘러 다가갔다.
“맘에 드는 계집을 찾으셨나요?” 우두머리가 물었다. “돈을 걸만 한 물건을요?”
“난 한 아가씨를 찾고 있네.” 명장이 강철같이 차갑고 단호한 어조로 애써 화를 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난 같을 말을 두 번 하지 않을 것이네. 그 여인은 키가 크고 긴 금발머리에 청록 빛 눈동자를 지녔네. 이름은 알리스테어. 하루나 이틀 전에 사라비아에서 이곳으로 끌려왔네. 그 여인이 이곳으로 끌려왔다고 들었네. 사실인가?”
우두머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씩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손님께서 찾으시는 물건은 이미 팔려갔습니다.” 우두머리가 대답했다. “아주 훌륭한 물건이었죠. 취향이 고상하시네요. 다른 물건을 한번 찾아보시죠. 조금 깎아드리겠습니다.”
에레크 명장은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분노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누가 그 여인을 데려갔나?” 명장이 무섭게 다그쳤다.
우두머리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그 노예한테 꽂히셨군요.”
“그 여인은 노예가 아니네.” 에레크 명장이 역정을 냈다. “그녀는 내 부인이네.”
우두머리는 놀란듯한 눈으로 에레크 명장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젖히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손님 부인이라니! 농담도 잘하시네요. 그렇지만 더 이상은 아니죠, 손님. 이제 그 물건은 다른 사람의 장난감이 됐습니다.” 우두머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둡게 변했다. 얼굴을 찌푸린 그의 모습은 마치 악마 같았다. 그는 뒤에 서있는 두 사내들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이제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좀 치워버려.”
근육이 우락부락한 두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에레크 명장 앞에 나타났다. 명장은 두 거구의 민첩함에 흠칫 놀랐다. 두 사내는 명장을 제압하기 위해 손을 뻗어 명장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두 사내는 자신들이 누구에게 덤비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명장은 두 사람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민첩했다. 명장은 재빨리 옆으로 비켜 뒤에서 한 사내의 손목을 잡아 뒤로 비틀었다. 사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명장은 동시에 팔꿈치로 다른 사내의 목을 가격했다. 명장은 앞으로 몸을 돌려 바닥에 누워있는 사내의 코를 가격해 코뼈를 으스러트렸다. 코뼈가 부서진 사내는 정신을 잃고 목을 붙잡고 바닥에 드러누운 다른 사내 위에 쓰러졌다.
두 사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에레크 명장은 사내들을 밟으며 우두머리에게 가까지 다가갔다.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우두머리는 두려움에 떨며 앉은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명장은 허리를 숙여 우두머리에게 가까이 다가가 주먹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쥐고 다른 손으로 단검을 꺼내 그의 목에 겨눴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말하거라. 그럼 살려줄 수도 있다.” 에레크 명장이 노여움을 토했다.
우두머리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말해요, 할게요. 그렇지만 다 시간 낭비입니다.” 우두머리가 입을 열었다. “귀족에게 팔았어요. 그분은 군대를 가지고 있고 궁전에 살아요. 엄청난 권력가에요. 그분의 궁전은 한번도 침략당한 적이 없어요. 더군다나 그분은 엄청난 병력을 가졌죠. 어마어마한 부자에요. 그분 주변에는 언제든지 목숨을 걸 용병들이 있다고요. 그분은 직접 거래한 계집을 모두 데리고 있어요. 손님의 부인을 거기서 데려오는 건 불가능한 입입니다. 그러니 그냥 왔던 곳으로 돌아가세요. 그녀는 이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