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숙명 - Морган Райс 2 стр.


“도와주세요!” 물 속에 빠진 부대원이 외쳤다.

“왕의 부대의 첫 번째 규칙이 뭐지?” 콜크 사령관이 살려달라는 부대원을 외면한 채 나머지 부대원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토르는 그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물 속에 빠진 부대원에게 신경이 쓰여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도움이 필요한 동료를 돕는 것입니다!” 엘덴이 외쳤다.

“그럼 저 부대원은 도움이 필요한가?” 콜크 사령관이 물 속의 부대원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바다 속 부대원은 물에 잠겼다 올라오기를 반복하며 물 밖으로 손을 뻗었다. 나머지 부대원들은 모두 난간 위에 서 있었다. 바닷물에 뛰어들기엔 모두 너무 두려울 뿐이었다.

그 순간 토르에게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물 속에 빠진 부대원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는 순간,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토르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죽음의 바다, 바다 괴물, 성난 파도, 이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토르가 생각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

토르는 난간에 올라 무릎을 구부렸고,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붉은 바닷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공중에 몸을 던졌다.

제5장

개리스 왕은 대 연회장에서 선대 맥길 왕의 왕좌에 앉아 길고 부드럽게 조각된 원목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눈 앞의 광경을 마주했다. 웅장한 연회장 속에는 링 대륙의 곳곳에서 모여든 수 많은 군중들이 생애 최대의 행사, 개리스 왕이 운명의 검을 들어올릴 수 있을지, 그가 진정한 선택된 자인지를 직접 목격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있었다. 선대 맥길 왕이 어렸을 적, 운명의 검을 대중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할 기회가 없었고 따라서 그 누구도 오늘의 행사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기대감과 흥분 감이 구름처럼 연회장을 떠도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개리스 왕은 사람들의 기대감에 무기력해졌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걸 바라보며, 연회장이 발 디딜 수 없을 만큼 수 많은 인파로 북적 이는 걸 바라보며, 자문위원단들의 의견을 따랐어야 했던 건지, 그들 말대로 대 연회장에서 대중을 모아 놓고 운명의 검을 들겠다는 자신의 결정이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문위원단들은 개리스 왕에게 검을 보관하는 별도의 비공개 실에서 의식을 진행하길 권했다. 만약 개리스 왕이 검을 드는 데 실패하면, 단지 몇 명만이 그 사실을 목격하는 데 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리스 왕은 아버지에게 충성했던 자문위원단들을 믿지 못했다. 또한 개리스 왕은 자문위원단들의 충고보다는 자신의 운명을 좀 더 자신했다. 따라서 왕국 전체가 자신의 위대한 능력을 직접 목격하길 바랬다. 자신이 선택된 자라는 걸 직접 확인시키고 싶었다. 그 순간을 모두의 눈 앞에 각인시키고 싶었다. 자신의 운명이 드러나는 그 순간을.

개리스 왕은 아주 우아한 모습으로 연회장에 입장했다. 자문위원단을 뒤로 대동하고 점잔을 빼며 한걸음 한걸음씩 내디뎠다. 머리 위로는 왕관을 이고 어깨에는 망토를 걸치고 두 손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홀을 들었다. 개리스 왕은 모두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 바로 진정한 왕, 맥길 가의 왕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싶었다. 개리스 왕의 예상과 같이, 그가 이 궁궐과 백성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여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개리스 왕은 이제 백성들이 그것을 몸소 느끼길 바랬다. 자신의 힘과 권력을 뽐내는 이 자리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길 바랬다. 오늘 이후, 모든 사람들이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선택 받은 자이자 진정한 왕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왕좌에 홀로 앉아있는 개리스 왕은 연회장 한 가운데에 곧 운명의 검이 놓일 무쇠 갈래가 천장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보자 확신을 잃었다. 이제서야 자신이 치러야 할 의식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졌다. 이젠 더 이상 뒤집을 수 없는 행보였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만일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다면? 개리스 왕은 이런 생각을 애써 지웠다.

저 멀리 한쪽에서 커다란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러자 곳곳에서 흥분 섞인 쉿, 조용히 라는 소리가 울렸고 고조된 기대감으로 이내 연회장엔 침묵이 흘렀다. 힘이 아주 건장해 보이는 12명의 병사들이 다같이 운명의 검을 이고 그 무게를 견디기 힘든 듯 안간힘을 쓰며 연회장에 들어섰다. 건장한 병사들은 6명씩 나란히 이열 종대로 중앙에 검을 이고 아주 천천히, 한 발짝씩 내디디며 운명의 검을 연회장 내부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운명의 검이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에 개리스 왕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순간, 개리스 왕은 자신감을 상실했다. 이렇게 건장한 체구의 병사 12명이 함께 들고서도 힘겹게 고군분투하며 겨우 이고 있는 저 검을 어떻게 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개리스 왕은 이러한 생각을 곧 마음 속에서 지워버렸다. 어찌됐든, 운명의 검은 힘이 아닌 운명에 따라 들어올릴 수 있는 검이었다. 이내 개리스 왕은 자신이 왕좌를 지킬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운명에 따라 이 자리에 서 있고, 선대 맥길 왕의 장자로서 태초부터 왕위에 오를 운명을 타고 났음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개리스 왕은 군중을 둘러보며 아르곤을 찾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개리스 왕은 충동적으로 아르곤의 의견을 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아르곤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아르곤 외에는 다른 누구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역시 아르곤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12명의 병사들이 햇살이 비치는 연회장 한 가운데에 이르렀고, 무쇠 갈래 위에 운명의 검을 어렵사리 내려놨다. 운명의 검은 금속이 부딪히는 쨍그랑 소리를 연회장 가득 울려 퍼트리며 무쇠 갈래 위에 놓여졌다. 연회장은 완전한 침묵 속에 휩싸였다.

군중들은 본능적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 개리스 왕이 운명의 검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다.

개리스 왕은 이 순간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군중의 관심을 만끽하며 천천히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개리스 왕은 다시는 이렇게 왕국 전체의 완전하고 강렬한 집중을 받는 순간이 오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더욱 신경 썼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순간을 셀 수도 없이 꿈꿔왔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이 순간을 음미하고 싶을 뿐이었다.

개리스 왕은 모두의 시선을 흠뻑 받으며 한걸음 한걸음씩 서서히 왕좌에서 내려왔다. 발 밑에 깔린 붉은 양탄자의 감촉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는 그렇게 햇살이 내리쬐는 운명의 검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꿈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꿈 속에서 수백만 번이나 검을 들어올린 덕에 이 양탄자 위를 걷는 자신의 모습이 익숙했다. 이 모든 것이 검을 들어올릴 자신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 했고, 지금 이 순간은 분명 운명을 향한 발걸음이었다.

그는 이 의식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었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운명의 검에 다가가 한 손을 뻗어 검을 쥐고 순식간에 극적으로 운명의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릴 것이다. 군중들은 놀라움을 숨지기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선택 받은 자라고 칭할 것이다. 맥길 왕가의 가장 위대한 왕이자 영원히 링 대륙을 지배할 선택 받은 왕. 군중들은 이 모든 광경에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고, 개리스 왕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두가 몸을 움츠리게 될 것이다. 군중들은 이러한 영광의 순간을 목격하고 선택 받은 자의 지배를 받는 시기에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군중들은 개리스 왕을 신처럼 숭배할 것이다.

개리스 왕은 운명의 검에 다가섰다. 검과의 거리는 이제 한 발짝뿐이었고 그는 마음 속 깊은 떨림을 느꼈다. 그는 내리쬐는 햇살 속으로 들어섰다. 기존에 수도 없이 검을 보와 왔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검이 내뿜는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검에 가까이 다가서서 검을 바라본 건 처음이었고 스스로도 이 사실이 놀라웠다. 검은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길게 뻗어 빛을 발하는 칼날은 그 누구도 그 금속의 속성을 밝혀내지 못했으며, 검 자루는 그가 지금껏 보아왔던 검 중에서 가장 화려했다. 최고급 비단처럼 보이는 직물로 에워싸인 검 자루에는 온갖 보석이 박혀있었고 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 발짝 더욱 가까이 다가서자 검의 주변으로 강력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덕분에 개리스 왕은 온 몸이 욱신거렸고 숨 쉬기가 불편했다. 이제 곧 검은 개리스 왕의 손에 쥐어지게 된다. 그는 하늘 높이 검을 치켜들 것이다. 전 세계가 볼 수 있도록 빛나는 태양 아래서 검을 들어올릴 것이다.

선택된 자, 개리스 왕, 영원한 통치자.

개리스 왕은 오른손을 뻗어 천천히 손가락으로 칼자루를 감쌌다. 온갖 종류의 보석들이 그의 손길에 전해지며 전율이 올랐다. 강력하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의 손바닥과 팔을 거쳐 온 몸에 흘렀다. 그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힘이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는 한 평생 이 순간만을 위해 존재했다.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나머지 한쪽 손도 함께 칼자루에 얹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숨을 넘겼다.

신의 가호에 따라 제가 이 검을 들 수 있게 해주소서. 제게 신호를 보내주소서. 제가 진정한 왕이라는 걸 보여주소서. 제가 선택 받은 지도자라는 걸 보여주소서.

개리스 왕은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완벽한 순간을 위한 신호를 기다리며 신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몇 초가 흐르고, 다시 몇 초가 흘렀지만 모든 군중이 모인 그 곳에서 신에게서는 어떠한 응답도 들을 수 없었다.

순간 개리스 왕의 눈앞에 자신을 노려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공포에 질린 개리스 왕은 아버지의 모습을 떨치기 위해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요동쳤다. 끔찍한 징조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찌됐든,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었다.

개리스 왕은 몸을 굽혀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들었다. 그가 가진 힘은 모두 쏟아 부었고 마침내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며 경련이 일어났다.

운명의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이 아니라 지구를 들어올려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개리스 왕은 더욱 힘을 가했고, 더욱 사력을 쏟고, 더욱 고군분투했다. 그는 한눈에도 낑낑거리며 악을 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운명의 검은 한 치의 움직임도 없었다.

개리스 왕이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연회장 곳곳에서 탄성이 일어났다. 몇몇 자문 위원단들이 개리스 왕에게 달려가 그의 안위를 살폈고 개리스 왕은 공격적으로 손을 저어 그들을 물렸다. 그는 난감한 모습으로 제 발로 다시 일어섰다.

굴욕감에 사로잡힌 개리스 왕은 군중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살피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군중들은 이미 몸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개리스 왕은 그들의 표정에서 실망감을 엿봤다. 그들의 눈에 개리스 왕은 또 다시 실패를 안겨준 왕일 뿐이었다. 이제 온 세상이, 링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진정한 왕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는 선택된 맥길 왕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왕위를 찬탈한 왕자일 뿐이었다.

개리스 왕은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 외로운 순간이었다. 그가 꿈꿔온 모든 것들이, 어린 시절부터 상상해온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 환상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스스로의 이야기를 의심 없이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스스로를 산산조각 냈다.

제6장

개리스 왕은 서둘러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스스로에게 놀랐으며 앞으로의 결과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했다. 속수무책이었다. 지금껏 7대의 선대 맥길 왕들이 들어올리지 못했던 운명의 검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들어올리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왜 스스로를 선대 왕들보다 우월하리라 생각했던 것인가? 왜 스스로는 다를 것이라 여겼던 것인가?

그는 짐작했어야 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만족했어야 했다. 왜 스스로를 몰아부친 것인가?

이제 그가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인이 알게 됐다. 이제 그의 통치는 이에 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아마도 이로 인해 자신이 아버지 암살의 배후라는 확신을 더욱 심어준 셈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개리스 왕은 이미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시선이 달라진 걸 느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꼭두각시 왕으로 여긴 듯 했으며. 모두의 시선이 이미 다음 왕을 맞을 준비를 하는 듯 했다.

더욱 비참한 건 바로,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잃은 것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자신의 운명을 확신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링 대륙을 통치하며,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는 선택 받은 자일 거라 믿었다. 이러한 그의 자만은 이제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이제 그는 모든 것에 확신을 잃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은, 검을 들어올리기 전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검을 들지 못한 건 아버지의 복수인 것일까?

“브라보,” 어디선가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말을 건넸다.

혼자였다 생각했던 개리스 왕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한번에 알아챘다. 지난 수 년간 익숙하게 들었던 그가 경멸하는 인물, 부인의 목소리였다.

헬레나.

그녀는 집무실 한쪽 구석에서 아편이 담긴 파이프를 피우며 개리스 왕을 주시했다. 아편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인 뒤 숨을 참고 다시 연기를 천천히 뱉어냈다. 헬레나 왕비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개리스 왕은 그녀가 아편 파이프를 지나치게 많아 피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것이오?” 개리스 왕이 물었다.

“여기 우리 집무실이잖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여기선 뭐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요. 난 당신 부인이자 왕비이니. 잊지 마요. 나도 당신처럼 이 왕국을 지배하는 인물이니까. 그리고 오늘 당신의 커다란 패배로 말미암아, 지배 라는 말은 아무나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개리스 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헬레나 왕비는 언제나 개리스 왕이 가장 힘들고 상황이 부적절한 시기에 그에게 큰 타격을 줬다. 그는 이 세상 그 어떤 여인보다 자신의 부인을 혐오했다. 둘의 결혼에 동의했던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가?” 개리스 왕이 몸을 돌려 침을 뱉고는 분노하듯 그녀에게 다가섰다. “내가 왕이라는 사실을 잊었나 본데, 아가씨, 네가 내 부인이든 아니든 왕국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난 널 구금시킬 수 있어.”

헬레나 왕비는 조롱 섞인 콧방귀를 끼며 개리스 왕을 비웃었다.

“그럼 어떻게 될까?” 헬레나 왕비가 반문했다. “네 백성들이 너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까? 아마도, 매우 그렇겠지. 그건 개리스란 인간이 계획한 일에 어긋나지. 그 누구보다 다른 이의 시선을 중시하는 남자에게는.”

개리스 왕은 헬레나 왕비 앞에 멈춰 섰다. 그녀가 언제나 자신을 꿰뚫어본다는 생각에 마음 속 깊이 심기가 불편했다. 개리스 왕은 그녀의 협박에 수긍했고 그녀와 말다툼을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그런 이유로 개리스 왕은 그곳에 서서 조용히 화가 가라앉길 기다리며 주먹을 움켜 쥐었다.

“바라는 게 무엇이오?” 개리스 왕은 분노를 애써 누르며 천천히 말을 걸었다. “당신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날 찾지 않소.”

그녀는 짧게 조롱 섞인 웃음을 날렸다.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직접 가져요.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요. 대신 이야기 좀 하러 왔죠. 당신의 왕국 전체가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당신의 모습을 봤어요.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리 라니?” 개리스 왕은 그녀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해 반문했다.

“이제 당신의 백성들도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됐잖아요. 당신이 패배자라는 사실이요. 당신이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요. 축하해요. 이제 이건 공식 사실이 됐네요.”

개리스 왕은 인상을 가득 썼다.

“내 아버지도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진 못했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국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한 건 아니었잖소.”

“그렇지만 왕권에는 영향을 받았죠,” 헬레나 왕비가 조롱하며 맞받아쳤다. “매 순간 순간마다요.”

“그렇게 내 무능력이 싫으면,” 개리스 왕은 씩씩대며 말했다. “이 곳을 왜 떠나지 않소? 날 떠나시오! 우습지도 않은 이 결혼을 끝내시오. 난 이제 왕이오. 그 누구도 더 이상 필요 없소.”

“그 말을 꺼내줘서 기쁘네요,” 헬레나 왕비가 대답했다. “그게 바로 제가 이곳에 온 이유에요. 당신이 공식적으로 우리의 결혼생활을 끝내줬으면 해요. 이혼해요.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진짜 남자요. 사실, 당신의 기사 중 한 명이에요. 그는 전사에요. 우린 서로 사랑해요. 진심이에요. 지금껏 만난 사람들과는 달라요. 더 이상 이 관계를 숨기지 않을 수 있도록, 이혼해줘요. 제 사랑을 공개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와 결혼하고 싶어요.”

개리스 왕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멍하니 왕비를 바라봤다. 심장에 단검이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왕비는 왜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인가? 왜 그 많은 순간 중 지금인가? 너무 버거웠다. 쓰러져 있는 자신에게 세상이 시련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리스 왕이 자신이 왕비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왕비가 실제로 이혼을 거론했을 때 무언가를 느꼈다. 분노가 치밀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와의 이혼을 원치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만약 개리스 왕이 먼저 이혼을 거론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가 거론했기에,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는 왕비가 손쉽게 원하는 걸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이혼이 왕권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었다. 이혼한 왕이라는 사실에 수 많은 질문이 쏟아질 것이 뻔했다. 더불어 개리스 왕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왕비가 사랑한다는 전사에게 질투가 났다. 또한 자신의 면전에서 남편으로서 부족한 남성성을 지적하는 왕비에게 분노했다. 그는 앙갚음을 해주고 싶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이혼은 못해주오,” 개리스 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나에게 묶어있소. 영원히 내 부인으로 살아야 하오. 당신에게 절대 자유란 없을 것이오. 또한 내가 만약에라도 그 전사를 보게 된다면, 그를 고문하고 처형할 것이오.”

헬레나 왕비는 개리스 왕에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난 당신 부인이 아니야! 당신 또한 내 남편이 아니지. 당신은 남자가 아니야. 이 결혼은 불성실한 결합일 뿐이야. 처음부터 그래왔어. 권력을 위해 계획된 협정일 뿐이야. 이 모든 것이 역겨워. 늘 그랬어. 그리고 이것 때문에 난 진정한 결혼생활을 할 기회를 박탈당했지.”

왕비가 숨을 골랐지만 그녀의 분노는 더해졌다.

“이혼을 해 줘야 할거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어떤 남자인지 왕국 전체에 고할 테니까. 당신이 결정해.”

이 말을 남기고 헬레나 왕비는 뒤돌아 걸어나갔다. 열려있는 방문을 나서며 다시 문을 닫는 수고도 잊었다.

개리스 왕은 석조 건물에 홀로 남아 왕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온 몸에 찬 기운이 들었음에도 차마 몸을 떨 수가 없었다. 이제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안정적인 것이 있을까?

개리스 왕은 열려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그는 이내 누군가 이곳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펄스가 나타나 개리스 왕은 헬레나 왕비와의 대화를 충분히 심사숙고 할 시간을 놓쳤다. 그녀의 협박을 제대로 가늠해볼 시간을 갖지 못했다. 펄스는 특유의 방정맞은 걸음걸이 대신 죄지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집무실에 들어섰다.

“개리스?” 펄스는 확신 없는 어조로 말을 건넸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주시하는 펄스를 보자 개리스 왕은 그가 얼마나 속상한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속상해야 한다고 개리스 왕은 생각했다. 어찌됐든, 운명의 검을 들라고 설득한 것도 펄스였고 자신을 능력 이상의 사람이라 헛바람을 넣은 것도 펄스였다. 펄스의 속삭임이 아니었다면, 누가 알았을까? 개리스 왕은 운명의 검을 들 시도조차 안 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개리스 왕은 분개하며 펄스에게 향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마땅한 대상을 찾았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은 펄스였다. 이 모든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이 바보 같은 펄스였다. 이제 개리스 왕은 또다시 선택 받지 못한 맥길 왕가의 왕일 뿐이었다.

“널 증오해,” 개리스 왕이 분개했다. “네 약속들은 지금 어떻게 됐지? 내가 운명의 검을 들어올릴 거라는 네 확신은?”

펄스는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펄스가 대답했다. “제가 틀렸습니다.”

“넌 많은 걸 틀리지,” 개리스 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생각하면 할수록 펄스는 모든 걸 망쳐놨다. 실제로 펄스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있었을 것이다. 그럼 개리스 왕은 이 엉망인 상황 속에 놓여있을 필요도 없었다. 왕권의 무게 또한 감당할 필요가 없었고 이 모든 것이 잘못 될 리가 없었다. 개리스 왕은 단순했던 과거가 그리웠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던, 자신이 왕이 아닌 시절이 사무쳤다. 그 모든걸 다 되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던 그대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이 모든 것을 원망할 펄스만이 눈 앞에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개리스 왕은 펄스를 압박했다.

펄스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저는 소문을…시중들이…떠드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폐하의 누이와 형제 분이 여기저기 파헤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제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두 사람은 하인들이 일하는 곳에서 목격됐습니다. 살인 무기를 찾으려고 오물 통을 수색했답니다. 제가 폐하의 아버지를 암살할 때 사용한 단검이요.”

펄스의 한마디 한마디에 개리스 왕의 몸이 굳어갔다. 공포와 두려움이 온 몸을 마비시켰다. 이 보다 더 엉망인 하루가 있을 수 있을까?

개리스 왕은 헛기침을 했다.

“그들이 뭘 찾았지?” 개리스 왕은 바짝 마른 입으로 겨우 말을 뱉었다.

펄스는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모르겠습니다, 폐하.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 분들이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리스 왕은 스스로도 믿지 못할 만큼 펄스에게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펄스의 갈팡질팡하는 태도만 아니었다면, 무기를 제대로 처리하기만 했더라면, 개리스 왕이 이러한 상황에 처할 리가 만무했다. 펄스 덕에 개리스 왕은 속수무책이었다.

“난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을 거야,” 개리스 왕이 펄스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호한 표정으로 펄스를 주시했다. “다시는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알아 듣겠나? 이 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거라. 왕실 밖으로 널 좌천 보내겠다. 만약 네가 이 성안에 발을 다시 디딘다면, 널 체포할 것이다.”

“당장 떠나!” 개리스 왕이 고함을 질렀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펄스는 뒤돌아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개리스 왕은 다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운명의 검을 생각했다. 스스로 큰 재앙을 초래했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절벽으로 자신을 몰아붙인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추락을 직면하게 될 뿐이었다.

개리스 왕은, 아버지의 집무실 석조 바닥 위 깊게 울리는 침묵 속에 홀로 서서 온 몸을 떨며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했다. 이 보다 더 사무치게 외로울 순 없었다.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것이 왕의 자리인가?

*

개리스 왕은 서둘러 원형의 석조 계단을 올랐다. 성의 가장 높은 난간을 향해 황급히 한 층 한층 올라갔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왕국의 전망과 백성들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줄 공간이 필요했다. 오늘 일어난 모든 악몽 같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는 여전히 이 왕국의 왕이었다.

개리스 왕은 뒤를 따르는 시중들을 물리고 홀로 계단을 헐떡거리며 올라갔다. 그러다 중간에 멈춰 몸을 구부리고는 숨을 골랐다. 두 뺨에 그의 눈물이 타고 내렸다. 계속해서 매 순간마다 자신을 꾸짖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신을 경멸해요!” 그는 허공에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그는 분명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비웃음이었다.

개리스 왕은 그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그는 쉬지 않고 원형 계단을 올라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눈 앞의 문을 박차고 나가자 신성한 여름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깊게 호흡을 들이마신 뒤 한참 동안이나 숨을 참으며 따뜻한 바람과 햇살을 만끽했다. 개리스 왕은 어깨에 걸친, 한때 자신의 아버지가 걸쳤던 망토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날이 무더웠기에 더 이상 망토를 걸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석조 벽으로 이뤄진 난간의 가장자리로 서둘러 자리를 옮겨 거친 숨을 쉬며 왕국을 내려다봤다. 끝없는 인파가 성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오늘 행사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인파였다. 저 수 많은 인파가 모두 자신의 통치 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갈 수 있단 말인가?

“왕좌란 재미있는 것이지요,”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개리스 왕이 뒤를 돌아보자 눈 앞에 아르곤이 보였다. 흰색 망토와 후드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한걸음 뒤에 떨어져있었다. 아르곤은 자신을 바라보는 개리스 왕을 바라봤다. 입가엔 미소가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소를 찾을 수 없었다. 아르곤의 두 눈은 불처럼 이글거렸고 개리스 왕을 꿰뚫어 보며 그를 한쪽으로 몰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을 너무 많은 것을 목격했다.

개리스 왕은 아르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묻고 싶은 게 끝도 없었다. 그러나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는가?” 개리스 왕이 간절하게 물었다. “자네는 내가 선택 받은 자가 아님을 미리 말해줄 수 있지 않았나. 날 이런 수모로부터 막아줄 수 있었네.”

“왜 그래야 하는지요?” 아르곤이 반문했다.

개리스 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은 왕의 진정한 조언자가 아니군,” 개리스 왕이 말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진정한 충고를 했을 망정, 내겐 그렇지 않구나.”

“아마도 폐하의 선왕께서는 진정한 조언을 누릴 자격을 갖췄던 거겠죠,” 아르곤이 대답했다.

개리스 왕의 분노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아르곤을 증오했다. 그리고 그를 원망했다.

“자네가 내 주변을 맴도는 걸 원치 않는다,” 개리스 왕이 말했다. “왜 선왕께서 자네를 곁에 두었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왕국에서 떠나길 바란다.”

아르곤은 공허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웃음을 터뜨렸다.

“선왕께서 절 곁에 두신 게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여,” 아르곤이 설명했다. “선왕의 선왕도 아니지요. 저는 이곳에 있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사실, 제가 그분들을 곁에 두었다고 정정해야겠지요.”

순간 아르곤은 개리스 왕 앞으로 바짝 다가가 그의 영혼을 꿰뚫어 보듯 그를 주시했다.

“폐하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르곤이 물었다. “폐하는 이곳에 있을 운명인가요?”

아르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개리스 왕의 신경을 강타했고, 개리스 왕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르곤이 던진 질문이야말로 개리스 왕 스스로가 궁금해했던 것이었다. 개리스 왕은 지금 아르곤이 자신을 위협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피로써 대위를 잇는 자는 피로써 지배한다,” 아르곤은 이 말을 남긴 채 뒤돌아 걸어갔다.

“기다리시오!” 개리스 왕이 소리쳤다. 아르곤이 사라지지 않길 바랬다. 그의 답이 필요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개리스 왕은 아르곤이 자신에게 오랜 시간 통치하지 못할 거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라 여겼다. 아르곤이 정말 그런 의미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남긴 건지 확인해야 했다.

개리스 왕은 아르곤을 쫓아 달려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아르곤은 눈 앞에서 사라졌다.

개리스 왕은 주변을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한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아르곤!” 개리스 왕지 다시 외쳤다.

개리스 왕은 다시 몸을 돌려 하늘 위를 바라봤다.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그는 사력을 다해 외쳤다:

“아르곤!”

제 7장

에레크 명장은 공작과 브랜디트와 나란히 북적 이는 사바리아의 길을 걸었고 그들 뒤로는 수십 명의 수행단이 따랐다. 그들이 시녀의 집을 향해 거리로 나오자 그들을 보기 위한 인파가 더욱 거세졌다. 에레크 명장은 지체 없이 바로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고집했고 공작은 직접 에레크 명장을 시녀에게 안내하겠다고 했다. 공작이 나서는 길을 따라 군중들이 뒤를 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뒤를 잇는 수 많은 군중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수많은 구경꾼들을 대동하여 그녀의 집에 당도하게 되리란 생각에 꽤나 민망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에레크 명장은 몇 가지 질문에 사로잡혔다. 그 여인은 누구인가, 기품이 흘러 넘치는 데도 불구하고 백작의 성에서 시녀 일을 하는 연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 내 눈앞에서 그렇게 급하게 사라졌던 것인가? 지난 세월 동안 수 많은 귀족 여인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여인만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인가?

한 평생을 왕족과 함께하며 왕의 후손으로 대접받은 덕에 에레크 명장은 한눈에 다른 이의 기품을 알아봤다. 그렇기에 에레크 명장은 그 여인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지금 하는 일과는 달리 좀 더 지체 높은 신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 곳에서 무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날 정도였다. 그는 다시 한번 두 눈으로 그녀를 보고 싶었다. 자신이 그저 멋대로 상상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이 맞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의 시중이 말하길 그녀는 도시의 외각에 머물고 있다고 하네,” 에레크 명장과 함께 걷던 공작이 설명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동시에 길가에 위치한 모든 집집마다 창문이 열리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고 모두가 평민이 사는 동네에 공작과 그의 수행원들이 등장한 까닭을 궁금해 했다.

“듣자 하니, 여관 주인의 하녀로 있다더군. 그녀의 출신이 어디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녀가 어느 날 이 도시로 왔고, 계약을 맺어 여관 주인의 하녀가 됐다는 것이네. 그녀의 과거는, 보아하니 불분명하네.”

일행은 또 다른 길로 들어섰다. 바닥에 깔린 자갈이 거칠었고 걸어 갈수록 보잘것없는 작은 집들이 더욱 밀집되어 붙어 있었다. 공작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이번 특별한 행사를 맞이해 그녀를 내 궁전의 시녀로 들인 걸세. 그녀는 조용하고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네.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네. 에레크 명장,” 공작이 에레크 명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고 한 손으로 명장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로 이 일에 확신이 있는가? 이 여인이, 누구이던 간에, 그녀는 그저 평민일 뿐일세. 자네는 왕국의 어느 여인이든 아내로 삼을 수 있지 않은가.”

에레크 명장은 이전과 같은 강렬한 표정으로 공작을 마주했다.

“저는 이 여인을 꼭 다시 봐야겠습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상관 없습니다.”

공작은 어쩔 수 없는 에레크 명장의 고집에 고개를 저었고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들은 이리저리 놓여있는 길을 걷고 좁은 모퉁이를 돌고 돌았다. 길을 따라 걸어갈수록 사바리아의 거리는 더욱 지저분해졌고 술 취한 취객들이 곳곳에 가득했으며 이곳 저곳으로 오물과 함께 닭들과 들개들이 떠돌고 있었다. 공작 일행은 여관을 지나 또 다른 여관을 지나쳤다. 거리 위로는 길가는 행인의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이들 앞으로 몇몇 술주정뱅이들이 비틀거리며 걸어 다녔고 어둠이 깊어져 횃불만이 길을 밝혀 주었다.

“공작님 행차이시니라!” 앞서 길을 안내하는 하인이 서둘러 술주정뱅이들을 밀치며 외쳤다. 거리 곳곳마다 불결해 보이는 길들이 이리저리 나뉘어져 있었고 에레크 명장과 함께 하는 공작의 일행을 본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들의 행렬을 지켜봤다.

마침내 공작 일행은 작고 초라한 여관 앞에 도착했다. 외부는 벽토가 발려 있었고 경사진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건물이었다. 일 층 주점은 대략 50여 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규모였고 이층에는 숙박객을 위한 객실 몇 개가 전부였다. 입구는 기울어져있었고 창문 하나는 유리창이 나가있었다. 입구에 달아놓은 램프가 삐뚤어져 횃불이 깜박거렸다. 공작 일행이 입구 근처로 다가서자 창문 밖으로 술 취한 취객들의 고성이 울려 퍼졌다.

그토록 기품이 넘치는 여인이 어찌 이런 곳에서 일을 한단 말인가? 안에서 울려 퍼지는 고성과 야유 소리에 개탄한 에레크 명장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겪을 고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이건 옳지 않다, 라고 명장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를 이곳에서 반드시 빼내오리라 다짐했다.

“신붓감을 찾기에 가장 최악인 장소를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공작이 에레크 명장을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브랜디트 또한 에레크 명장을 바라봤다.

“이게 마지막이네, 친구,” 브랜디트가 입을 열었다. “궁전에는 아직 자네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여인들로 가득하네.”

그러나 에레크 명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렀다.

“문을 여시오,” 에레크 명장이 명령했다.

공작의 시중 하나가 앞으로 달려와 여관 문을 활짝 열었고 그와 동시에 오래된 술 냄새가 퍼져 나와 시중은 얼굴을 찌푸렸다.

내부에는 술 취한 취객들이 바에 엎드려 있었고, 목재 의자에 걸터앉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서로 조롱을 퍼붓고 이리 저리 밀치고 있었다. 인생을 막사는 사람들이라는 걸 에레크 명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산처럼 튀어나온 배와 얼굴에는 깍지 않은 무성한 수염, 세탁하지 않은 옷을 걸친 주정뱅이들이었다. 그 누구도 전사의 기량을 가진 자는 없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를 찾기 위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와 같은 여인이 이런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곳이었다. 혹시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저는 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에레크 명장이 옆에 서 있던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배는 산처럼 솟아 있었고 얼굴은 수염을 깎지 않아 덥수룩했다.

“아니 그럼 당신은?” 사내는 조롱하듯 소리를 크게 외쳤다. “그럼, 잘못 찾아왔소! 여긴 사창가가 아니야. 사창가는 저기 길 건너에 있지. 거기 여인들이 꽤나 실하고 포동포동 하다더군!”

Назад Дальш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