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에레크 명장의 면전에 대고 거슬릴 만큼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사내의 친구들 또한 사내와 함께 웃어댔다.
“제가 찾는 건 사창가가 아닙니다,” 언짢아진 에레크 명장이 대답했다. “한 여인을 찾고 있어요, 여기서 일하는.”
“여관 주인의 하녀를 찾는 거군,” 거구의 술 취한 한 사내가 저 멀리서 대답했다. “아마 저 뒤에서 바닥을 닦고 있을 거요. 안됐지,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 무릎 위에!”
술집에 있던 모든 사내들이 사내의 농담에 정신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에레크 명장은 그러한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그녀가 이러한 형편없는 사내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경멸스러웠다.
“그쪽은 뉘신지요?” 멀리서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다른 사내들보다 눈에 띄게 체구가 건장하고 짙은 수염에 짙은 눈빛을 지닌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얼굴 가득히 인상을 쓰고 단단한 턱이 눈이 뛰었다. 그는 지저분해 보이는 여러 명의 사내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는 근육이 가득한 거구로 에레크 명장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분명한 시비였다.
“내 하녀를 뺏어가려는 거요?” 사내가 말했다. “그럼 한번 겨뤄보시지!”
사내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 에레크 명장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오랜 훈련을 수행한 왕국 최고의 전사인 에레크 명장은 사내가 상상조차 못한 반응을 보여줬다. 사내가 에레크 명장에게 손을 대려는 순간, 명장은 순식간에 그의 손목을 쥐고 번개처럼 사내를 뒤집어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저 멀리 날려버렸다.
거구의 사내는 마치 포탄처럼 날아가 주변에 있던 무리들과 섞여 볼링 핀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며 술집은 적막에 휩싸였다.
“싸워라! 싸워라!” 취객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정신을 못 차리던 여관 주인은 고함을 외치며 에레크 명장에게 달려들었다.
에레크 명장은 더 이상 인내하지 않았다. 명장은 앞으로 나서 한쪽 팔을 들어 팔꿈치로 여관 주인의 얼굴을 가격해 코뼈를 부러뜨렸다.
여관 주인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레크 명장은 여관 주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거구의 체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명장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치켜 든 여관 주인을 허공으로 던졌고 여관 주인은 그렇게 허공을 갈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술집에 있던 모든 사내들이 이야기를 멈추고 그대로 굳었다. 적막이 흘렀고 모두가 에레크 명장이 예사 인물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순간 술집의 바텐더가 술병을 머리 위로 들고 민첩하게 에레크 명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급습을 간파한 에레크 명장은 이미 검을 뽑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명장이 검을 채 뽑기도 전에 브랜디트가 앞으로 나서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달려오는 바텐더의 목을 겨눴다.
바텐더는 자신을 겨눈 단검 앞에서 그대로 굳었다. 조금만 더 움직였더라면 칼날이 살을 파고들었을 게 분명했다. 바텐더는 그렇게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뜨고 땀을 흘리며 한 손에는 병을 쥐고 멈춰있었다. 그렇게 술집 안은 침묵이 흘렀고 너무나 고요해 저 멀리서 못이 떨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병을 내려 노시오,” 브랜디트가 명령했다.
바텐더는 브랜디트의 말에 따라 술병을 바닥에 던졌다.
에레크 명장은 칼날이 칼집에 부딪히는 금속 소리와 함께 검을 빼 들어 여관주인에게 다가갔다. 여관 주인은 여전히 바닥 위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명장은 그의 목에 칼끝을 겨눴다.
“두 번 이야기하지 않겠다,” 에레크 명장이 입을 열었다. “여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거라. 당장. 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길 바란다. 단 둘이서.”
“공작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술집의 모든 사람들이 공작이 있는 쪽을 바라봤고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술집으로 들어서는 공작을 한눈에 알아봤다. 모두가 서둘러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이곳을 나가지 않는다면,” 공작이 말을 이었다. “여기 남은 모든 자를 구금할 것이다.”
순식간에 술집은 광란에 빠졌다. 술을 마시던 사내들은 일제히 서둘러 입구 앞에 서있는 공작을 지나쳐 술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시던 술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네도 나가시게,” 브랜디트가 겨누던 칼끝을 내리고 바텐더의 머리를 붙잡아 술집 밖으로 내던지며 말했다.
소란스러웠던 실내가 이제는 고요해졌다. 술집에는 여관주인을 비롯해 에레크 명장, 브랜디트, 공작과 열 두 명의 공작 수행원이 남아있었다. 수행원들은 철커덩 소리를 내며 술집 문을 내렸다.
에레크 명장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며 바닥에서 코피를 닦고 있는 여관 주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여관 주인을 그의 뒤에 있는 벤치 위에 앉혔다.
“당신이 내 장사를 망쳤소,” 여관 주인이 불평했다.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공작이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여관 주인을 마주봤다.
“자네가 이 젊은이에게 손을 대려 한 것만으로도 난 자네를 처형할 수 있네,” 공작이 여관 주인을 책망했다. “이 사람이 누구인 줄 아는가? 에메크 명장일세, 왕의 최정예 기사이자 최고의 실버 전사이지. 에레크 명장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자네를 없앨 수 있네.”
여관 주인은 고개를 들어 에레크 명장을 바라봤다. 그는 처음으로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고 제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제가 몰라봤습니다. 뉘신지 말씀을 안 해주셨잖아요.”
“그녀는 어디 있는가?” 에레크 명장은 급한 마음에 여관 주인을 다그쳤다.
“저 뒤에서 주방을 청소하고 있습니다. 제 하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뭘 훔치기라도 했나요? 쟤는 그저 제가 고용한 하녀일 뿐입니다.”
에레크 명장은 단검을 꺼내 여관 주인의 목을 겨눴다.
“다신 한번 그녀를 ‘하녀’라고 불러보게,” 에레크 명장이 경고했다. “그럼 네 목을 잘라버리겠네. 알겠는가?” 명장이 여관 주인에게 칼끝을 겨누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여관 주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서둘러 이곳으로 데려오거라,” 에레크 명장이 여관 주인의 발을 차며 뒷문 쪽을 향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여관 주인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자 주방 쪽에서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고 소리 없는 다그침이 들려왔다. 얼마 후, 주방 문이 열렸고 보잘것없는 넝마로 만든 원피스에 주방 기름을 잔뜩 묻힌 하녀 여럿이 걸어 나왔다. 60대쯤으로 보이는 세 명의 여성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자신이 말한 여인이 누구인지 여관 주인이 알긴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곧, 세 명의 하녀 뒤로 그녀가 뒤따라 걸어 나왔다. 순간 에레크 명장은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찾던 그녀였다.
기름때가 가득 묻은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고개를 들기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는 뒤로 묶어 천으로 감싸여 있었고 양 볼은 그을음이 묻어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의 피부 결은 아이처럼 티없이 맑았다. 뺨이 높고 턱이 가늘며 작은 코 위로는 주근깨가 보였고 입술은 도톰했다. 넓고 기품 있는 이마 위로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보닛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녀는 잠시 에레크 명장을 힐끗 바라봤고 그 덕분에 보석같이 아름다운 엷은 황록색 눈동자가 불빛에 비춰 크리스탈 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이 모습을 바라본 에레크 명장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에레크 명장을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처음 봤던 그 때보다 더욱 그녀에게 매료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뒤로 여관 주인이 인상을 쓰며 여전히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걸어 나왔다. 그녀는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와 에레크 명장 앞으로 먼저 나와있던 노년의 여성들에게 둘러 쌓였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무릎을 구부려 인사를 건넸다. 공작이 대동한 수행원들과 함께 에레크 명장은 그녀 앞에 다가가 그녀를 마주봤다.
“주군,” 그녀의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 에레크 명장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제가 주군께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제가 공작님의 궁궐에 들어가 주군께 실례를 범한걸 용서해 주십시오.”
에레크 명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어투와 어조, 음색을 듣자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끊임 없이 속삭여주길 바랬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 부드럽고 자상하게 그녀의 턱을 치켜 세웠다.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요동치는 듯 했다. 푸른 빛 바닷물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제게 무례를 범한 건 없습니다. 아가씨가 결코 제게 무례를 범할 일을 없을 듯 합니다. 저는 누군가를 질책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사랑에 끌려 왔습니다. 아가씨를 본 순간부터 아가씨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옮겼고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듯 그녀는 양 손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분명 이런 일이 처음인 듯 보였다.
“말해주십시오, 아가씨.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알리스테어 입니다,” 그녀의 어조가 겸손했다.
“알리스테어,” 그녀의 어조에 압도당한 듯,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이름을 되새겼다. 그가 들어본 이름 중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저는 왜 주군께서 저를 궁금해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주군께서는 귀족이십니다. 허나 저는 하녀일 뿐입니다.”
“내 하녀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여관 주인이 앞으로 나서며 심술궂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쟤는 저에게 고용됐습니다. 계약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몇 년 전에요. 7년 동안 하녀로 일하기로 약속했지요. 그 대가로 저는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하고요. 이제 삼 년 지났습니다. 그러니 보시다시피 시간 낭비 하시는 겁니다. 쟤는 제 소유물입니다. 제 하녀에요. 주군께서는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 제거니까요. 아시겠습니까?”
에레크 명장은 그 동안 그 누구에게도 품지 않았던 경멸감을 여관 주인에게 품었다. 한편으로는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 여관 주인의 심장을 찔러 이 자리에서 그를 없애고 그와 그녀의 계약관계를 종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자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든 상관없이, 에레크 명장은 왕의 법규를 어기고 싶지 않았다. 어찌됐든, 에레크 명장의 행동 하나하나가 왕권을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법은 법이지,” 에레크 명장이 단호하게 여관 주인에게 대답했다. “법을 어길 생각을 없네. 다만, 내일 마상경기가 열리네. 여느 사내들과 같이 그곳에서 우승하면 난 내 신부를 고를 수 있지. 그리고 난 알리스테어 아가씨를 선택하겠다고 미리 말해두겠네.”
술집 안에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건,” 에레크 명장이 말을 이었다. “ 만약 이 아가씨가 허락을 해 준다면 말일세.”
에레크 명장은 알리스테어를 바라봤다.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의 시선에 수줍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가씨?” 에레크 명장이 물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이었다.
“주군,” 알리스테어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주군께선 제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이곳에 왜 왔는지 알지 못하십니다. 송구스럽지만 전 이 모든 것들을 주군께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에레크 명장은 알리스테어를 바라보았다.
“왜 말해줄 수 없는 것이오?”
“이곳에 온 이후로 그 누구와도 제 얘기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맹세를 했지요.”
“그렇지만 왜요?” 에레크 명장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알리스테어를 재촉했다.
그러나 알리스테어는 말 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사실입니다,” 나이 많은 하녀가 대신 대답했다. “이 아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한번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또는 왜 이곳에 왔는지 도요. 대답을 안 해요. 지난 몇 년간 계속 물어봤었는데도요.”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이야기에 크게 당황했다. 결국 알리스테어에 대한 의문만 커질 뿐이었다.
“만일 아가씨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면,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에레크 명장이 말했다. “아가씨의 맹세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가씨에 대한 제 마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아가씨, 당신이 누구이든 제가 내일 개최되는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우승의 대가로 아가씨를 선택하겠습니다. 이 왕국 전체에서 그 누구도 아닌 아가씨를요. 다시 한번 여쭈겠습니다. 허락 해주시겠습니까?”
에레크 명장은 시선을 떨구고 있는 알리스테어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그녀는 뒤돌아 주방을 향해 술집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들어왔던 문으로 급하게 나간 뒤 등뒤로 문을 닫아버렸다.
에레크 명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봤지요, 시간만 낭비했군요, 쟤는 제겁니다.” 여관 주인이 입을 열었다. “쟤는 싫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가세요.”
에레크 명장을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싫다고 말한 적이 없네.” 브랜디트가 끼어들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
“그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 거요,” 에레크 명장이 알리스테어를 변호했다. “누가 뭐라 해도 심사 숙고해야 할 일이니까. 그녀는 또한 날 잘 알지도 못하지 않소.”
에레크 명장은 그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밤 이곳에서 머물겠네,” 에레크 명장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자네는 내게 방 하나를 내주시게, 그녀의 방 가까이로. 내일 아침 경기 시작 전에 그녀에게 다시 한번 허락을 구해볼 것이네. 그녀가 허락하고 내가 우승한다면, 나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거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네가 그녀와의 노예계약을 파기하도록 자네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녀와 함께 이곳을 떠나겠네.”
여관 주인은 한눈에 봐도 에레크 명장이 하룻밤을 그의 여관에서 보낸다는 사실에 불만이었지만 감히 그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빠르게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등뒤로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정말 이 곳에 머무를 생각인가?” 공작이 물었다. “우리와 함께 궁전으로 돌아가게나.”
에레크 명장은 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 생에 이보다 더 확신을 가진 일은 없습니다.”
제8장
토르는 허공을 갈라 얼굴을 수면으로 향하고 휘몰아치는 불의 바다 속으로 다이빙했다. 바닷물 속으로 깊이 잠수한 토르는 이내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고 뜨거운 바닷물의 감촉을 온 몸으로 느꼈다.
토르는 잠시 바닷물 속을 들여다봤고 이내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알 수 없는 온갓 종류의 크고 작은 괴상한 생김새의 바다 괴물이 시야 속에 들어왔다. 바다 생물로 가득한 바다였다. 보트로 안전하게 이동할 때까지 바다 괴물의 공격이 없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토르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 숨을 들이쉬며 물에 빠진 부대원을 찾았다. 때마침 물에 빠진 부대원이 허우적거리다 기력을 잃고 물 속으로 가라앉는 찰라 토르는 부대원을 발견했다. 몇 초만 늦었더라도 그는 그대로 익사했을 게 분명했다.
토르는 부대원에게 다가가 그를 붙잡은 뒤, 두 사람 모두 수면 위로 고개를 들어 숨을 쉴 수 있도록 한쪽 팔로 뒤에서 그의 쇄골을 감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 주변을 돌아보니 놀랍게도 크론이 보였다. 크론이 토르를 쫓아 바다 속으로 따라 들어온 게 분명했다. 작은 표범은 토르 옆에서 칭얼거리며 열심히 헤엄을 쳤다. 토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을 쫓아온 크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 손에는 부대원을 붙잡고 한 손은 헤엄을 쳐나가야 했기에 크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붉은 소용도리가 치는 물살이 험했고 괴상한 생물체들이 토르 주변에서 수면 위로 몸을 내밀었다 이내 사라졌지만 토르는 주변 환경에 최대한 마음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4개의 다리와 두 개의 대가리를 가진 흉악한 생김새의 보라 빛 바다괴물이 토르 가까이에서 모습을 보이며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에 토르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르의 시선은 20미터 거리에 있는 보트를 향했다. 한 손에는 부대원을 이끈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헤엄쳤다. 부대원은 온 몸을 마구 뒤틀며 소리를 질러댔고 이에 토르는 두 사람 모두 그대로 물 속에 잠겨버릴 지도 몰라 불안했다.
“가만히 좀 있어!” 토르는 부대원이 잠잠해지길 간절히 바라며 거칠게 소리질렀다.
마침내 부대원이 잠잠해지자 토르는 잠시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바로 옆에서 커다란 물살이 일어나는 소리에 토르는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바다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개의 촉수를 지닌 작은 노란색 생명체였다. 대가리가 사각형인 모습이 눈에 뛰었다. 바다 괴물은 토르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돌진했다. 대가리가 각지지만 않았다면 바다에 사는 방울뱀이라 착각했을 정도로 모습이 흡사했다. 근접하는 바다 괴물을 보며 토르는 몸을 감쌌다. 그러나 바다 괴물이 자신을 물 거란 예상과 달리 바다 괴물은 아가리를 크게 열어 토르에게 바닷물을 쏟아냈다. 토르는 물살에 감겼던 눈을 뜨며 시야를 확보했다.
바다 괴물은 그렇게 토르 주변을 에워싸고 이리저리 헤엄쳤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토르는 더욱 사력을 다해 헤엄쳐나갔다.
진전이 보였다. 토르는 보트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때마침 또 다른 바다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얇고 긴 주황빛을 띠는 형상에 아가리에는 날카로운 두 개의 송곳니가 나 있었고 12개의 작은 다리가 뻗어있는 생명체로, 뒤로는 기다란 꼬리를 사방으로 휘감고 있었다. 마치 정면으로 서있는 바다가재 모습을 닮아 있었다. 바다 괴물은 물 곤충처럼 물가를 따라 토르 가까이 다가와 몸을 돌리며 꼬리를 휘저었다. 꼬리가 토르의 한쪽 팔을 스치며 토르의 팔을 휘갈겼고 그와 동시에 꼬리에 붙은 촉수가 토르의 팔을 그대로 파고들어 토르는 커다란 고통을 토로했다.
바다 괴물은 계속해서 앞뒤로 이동하며 쉬지 않고 토르를 찔러댔다. 토르는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 공격하고 싶었으나 움직일 수 있는 손은 한 손뿐이었고 할 수 있는 건 그 손으로 헤엄을 치는 것뿐이었다.
토르 옆에서 헤엄치던 크론이 바다 괴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크론이 털을 바짝 세우고 용감하게 바다 괴물을 향해 달려들자 위협을 느낀 바다괴물은 물 속으로 종적을 감췄다. 토르는 겨우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바다 괴물은 크론을 피해 반대편에서 토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론은 바다 괴물을 향해 방향을 바꿔 헤엄쳤고 이를 잔뜩 드러내고 잡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토르는 죽기살기로 헤엄쳤다. 바다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영원 같던 시간이 지났고 토르는 보트에 도착했다. 파도에 맞서 보트는 이리저리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보트 위에는 나이가 많은 부대원 두 명이 타고 있었다. 기존에 토르 또는 토르 일행과 일면이 없던 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은 토르를 돕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두 부대원은 자신들의 재량에 따라 몸을 앞으로 내밀어 토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토르는 물에 빠졌던 부대원을 먼저 구출했다. 보트 위의 부대원들은 물에 빠졌던 부대원의 팔을 잡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내 토르는 크론에게 팔을 뻗어 크론의 배를 들어 물 밖 보트 위로 크론을 던져 올렸다. 크론은 네 발로 나무로 만든 보트의 표면을 긁어 마찰 소리를 내며 미끄러짐을 막았다. 크론의 털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크론은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젖어있는 나무 보트 위에서 잠시 미끄러지는 듯 했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크론은 곧장 보트 가장자리로 달려가 토르를 찾았다. 크론은 바다를 바라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토르는 나이 많은 부대원 한 명의 손을 잡았다. 부대원이 토르를 끌어 올리던 찰라, 토르는 한쪽 발목과 허벅지에 단단한 근육이 감기는 느낌을 받았다. 뒤돌아 아래를 살핀 토르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연노란 푸른 빛의 오징어 형태를 한 바다 괴물이 토르의 다리를 촉수로 단단히 감고 있었다.
살 속으로 촉수가 파고드는 순간 토르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질렀다.
신속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목숨이 날아갈 상황이었다. 토르는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몸을 구부려 촉수에 내리꽂았다. 그러나 단단하고 두꺼운 촉수를 단검으로 찌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토르의 행동에 바다괴물은 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수면 위로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냈다. 초록빛 형상에 눈이 없었고 기다란 목 위로 커다란 두 개의 하관을 벌려 토르를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토르는 다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무슨 수를 강구해야 했다. 나이 많은 두 명의 부대원들이 사력을 다해 토르를 끌어올렸지만, 토르는 점점 미끄러져 토르의 몸이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론은 쉼 없이 소리를 질렀고 털을 바짝 세운 채 금방이라도 바다 속으로 뛰어들 기세로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설사 크론이 뛰어들어 공격한다 하더라도 바다 괴물에게는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나이 많은 부대원 한 명이 앞으로 몸을 빼고 크게 외쳤다”
“몸을 피해!”
이에 토르는 몸을 숙였고, 나이 많은 부대원들을 물 속의 바다 괴물을 향해 창을 던졌다. 창은 빠르게 날아갔지만 목표물을 놓쳤다. 부대원들이 던진 화살은 바다 괴물에 아무런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물 속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바다 괴물을 창으로 공격하기엔 바다 괴물의 움직임이 굉장히 날렵했고 또 형체가 너무 가늘었다.
순간 크론이 보트에서 뛰어올라 물 속으로 몸을 날렸다. 크론은 바다 괴물 위에 안착해 날카로운 이빨로 바다 괴물의 목덜미를 공격했다. 크론은 바다 괴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다 괴물의 목덜미에 이빨을 단단히 고정했다.
그러나 모든 게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다. 바다 괴물의 피부는 상상도 못할 만큼 질기고 단단했다. 바다 괴물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크론을 멀리 날려버렸다. 그러는 동시에 토르의 허벅지를 계속해서 단단히 조였다. 벗어날 수 없는 덫에 다리가 끼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 숨을 쉬기가 고통스러웠다. 다리를 감싼 촉수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고 이내 다리가 잘려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토르는 자신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나이 많은 부대원을 손을 놓고 허리에 찼던 작은 단검을 빼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토르는 단검을 빼내자 마자 손에서 놓쳐버렸다. 순간 채 놀라기도 전에 이미 토르의 얼굴은 바닷물 속에 잠겨버렸다.
토르는 보트에서 멀어져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바다 괴물이 토르를 보트 반대편으로 빠르게 끌고 들어갔다. 토르는 속절없이 보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눈앞에는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보트의 형상만이 아른거렸다. 이후 토르가 기억할 수 있었던 건 바다 속 깊숙이 끌려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토르는 불의 바다 깊숙한 곳으로 끝도 없이 빠져 들어갔다.
제9장
그웬돌린 공주는 활짝 펼쳐진 들판 위를 뛰었다. 공주의 곁에는 그녀의 아버지, 맥길 왕이 함께였다. 어린 시절의 공주였다. 공주는 10살쯤 되어 보였고, 그만큼 맥길 왕도 젊어 보였다. 맥길 왕의 턱수염이 짧았고 흰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젊어 보였고 피부에는 주름 없이 광채가 났다. 맥길 왕은 근심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웬돌린 공주의 손을 잡고 공주와 함께 벌판을 뛰며 거침없이 웃었다. 공주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공주가 알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맥길 왕은 그웬돌린 공주를 번쩍 들고 그의 어깨에 공주를 앉힌 뒤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았다. 맥길 왕은 더욱 크게 웃었고 그웬돌린 공주는 정신 없이 깔깔거렸다. 아버지의 어깨에 앉은 공주는 안락하고 편안했다. 이 순간이 계속되어 멈추지 않길 바랬다.
그러나 맥길 왕이 그웬 공주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눈부시게 빛나던 태양은 사라지고 땅거미가 내려 앉았다. 그웬 공주의 두 발이 바닥에 닿자, 들판의 꽃들이 자취를 감췄고 공주의 발목까지 진흙이 덮였다. 몇 발자국 옆에 있던 맥길 왕은 하늘을 정면으로 보며 진흙 위에 곧게 누웠다. 방금 전과 달리 아주 많이 늙은 모습이었고 그렇게 진흙 바닥에 고정되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누워있음에도 맥길 왕의 머리 위에 놓인 왕관은 빛을 반짝였다.
“그웬돌린,” 맥길 왕이 힘겹게 말을 뱉었다. “나의 딸. 나를 도와다오.”
맥길 왕은 진흙더미 속에서 한 손을 위로 뻗고 절실히 공주를 찾았다.
공주는 황급히 아버지를 돕기 위해 서둘렀다. 아버지에게 달려가 손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발은 그대로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발 밑을 보니 진흙 속에서 공주의 발이 꼼짝 없이 고정됐고 진흙은 순식간에 말라붙어 갈라졌다. 공주는 헤어나오기 위해 계속해서 발버둥쳤다.
그웬 공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떠보니 왕실의 난간에서 왕국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가 달랐다. 왕국은 예전과 달리 화려함과 축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무질서한 묘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자랑했던 왕국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제는 저 끝까지 묘지일 뿐이었다.
공주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본 공주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암살자가 다가오는 모습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암살자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벗어 던졌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한쪽 눈이 없었고 이리저리 난 눈가의 흉터가 인상 깊었다. 그는 으르렁 거리며 한 손을 들어 번쩍이는 단검을 높이 쳐들었다. 단검의 칼끝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암살자의 움직임이 너무나 민첩해 공주는 제대로 숨지도 못했다. 공주는 이제 곧 죽게 되리란 생각에 몸을 잔뜩 웅크렸고 암살자는 있는 힘껏 단검을 내리 꽂았다.
그러나 순간 암살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공주가 눈을 뜨고 위를 바라보니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맥길 왕은 시체의 형태로 나타나 공중에서 암살자의 팔목을 쥐어 잡고 있었다. 맥길 왕이 잡고 있던 손을 비틀어 끝내 암살자는 단검을 떨어뜨렸고, 맥길 왕은 암살자를 어깨에 들춰 메고 난간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웬 공주는 허공으로 떨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암살자의 절규를 들었다.
맥길 왕은 공주에게 몸을 돌려 공주를 지그시 바라봤다. 한 손으로는 부드럽고 단단하게 공주의 어깨를 짚고 있었지만 맥길 왕의 표정이 단호했다.
“네가 여기 있으면 위험하단다,” 맥길 왕이 경고했다. “여긴 안전하지 않아!” 맥길 왕이 고함쳤다. 공주의 어깨를 짚고 있던 맥길 왕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공주는 아픔을 호소했다.
그웬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공주는 침대에서 허리를 세우고 상반신을 일으켰고 암살자를 찾기 위해 자신의 침실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러나 침실 안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깊은 적막이 새벽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주는 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쉬었다. 공주는 잠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 안을 걸었다. 서둘러 작은 석조 대야로 걸음을 옮겨 계속해서 찬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그리고는 벽에 몸을 기댔다. 공주는 그렇게 더운 여름 새벽 날, 차가운 석조 바닥에 맨발을 디디고 발 끝에서 전해지는 시원함을 온전히 느꼈다. 공주는 애써 정신을 추슬렀다.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꿈이었다.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아버지로부터의 경고가 분명했다. 메시지였다. 공주는 순간 지금 당장 왕실을 떠나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절대 다시는 돌아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실을 떠나는 건 그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공주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그러나 공주가 눈을 감을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경고를 보내오는 게 분명했다. 혼란스러운 꿈을 잊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공주는 창 밖으로 첫 번째 태양의 일출을 바라봤다. 이내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맑게 해줄 유일한 장소, 왕의 강을 떠올렸다. 공주는 그곳에 가야만 했다.
*
그웬돌린 공주는 얼음처럼 차가운 왕의 강물 속에 숨을 참고 몸을 구부려 계속해서 얼굴을 적셨다. 공주는 어린 시절 발견한 바위 사이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천연 풀장 같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상부에 위치한 산 속의 샘에 가려져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공주는 물 속으로 머리를 밀어넣었다. 차가운 강물의 물살이 공주의 머리칼을 흔들며 냉기를 뼈 속까지 전달했다. 차디찬 강물이 그녀의 알몸을 정화해주는 느낌이었다.
이 외딴 곳을 발견한 건 오래 전이었다. 높은 산 속 나무 사이에 가리워진 이곳은 작은 고원으로, 강물의 물살이 정체되어 깊고 맑은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공주의 머리 위로는 강물이 작은 폭포처럼 쏟아졌고 그렇게 쏟아진 강물은 계속해서 흐르다 이 고원에서 고이며 약한 물살을 일으켰다. 호수는 깊었지만 호수를 담고 있는 바위는 부드러웠다. 쉽게 노출되지 않는 아늑한 장소였기에 걱정 없이 알몸으로 몸을 담갔다. 공주는 여름이 되면 매일 아침 해가 뜰 무렵 이곳을 찾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특히 오늘같이 꿈자리가 사나운 날에는 더욱 서둘러 이곳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꿈이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인지 또는 경고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공주의 어지러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인지 또는 정말 대비를 하도록 찬스를 주려는 건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웬돌린 공주는 따뜻한 여름 아침 공기를 마시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주변에서 나무 위의 새들이 짹짹거렸다. 공주는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바위에 기댔다. 얼굴을 제외한 몸은 여전히 물 속에 담그고 튀어나온 바위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공주는 양 손으로 얼굴에 물을 적셨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길고 긴 머리카락을 쓸었다. 강물의 표면 위로 하늘이 반사됐다. 두 번째 태양이 이미 하늘 위로 솟고 있었고 강물 위로 뻗은 나무들 사이로 공주의 얼굴이 비쳤다. 흔들리는 강물의 표면 위로 공주의 두 눈이 푸른빛으로 빛났다. 공주는 자신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느꼈다. 공주는 고개를 돌려 다시 꿈에 대해 생각했다.
공주는 아버지의 암살자가 있는, 첩자들이 가득한, 음모가 들끓는 왕실에 머무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개리스 오빠가 왕으로 있는 왕실이었다. 개리스 오빠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늘 앙심을 품고 피해망상에 젖어있었다. 또한 그 누구보다 질투와 시기심이 강했다. 그는 모두를 적으로 여겼으며 특히 그웬 공주에겐 더욱 적개심을 품었다. 그 어떤 일이 공주에게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공주는 자신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안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망갈 인물이 아니었다. 공주는 아버지를 암살한 자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만약 그가 개리스 오빠라면, 더더욱 오빠가 법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도망칠 수 없었다. 공주는 아버지를 해한 암살자가 잡히기 전까지 아버지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평생 정의를 구호처럼 언급했었다. 그리고 아버지야말로 세상 그 모든 사람들보다 죽음 앞에 정의를 밝힐 자격이 충분했다.
그웬 공주는 고드프리 오빠와 함께 만났던 스태픈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그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도대체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공주는 때가 되면 그가 스스로 말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끝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공주는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의 암살자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했다.
공주는 마침내 물 밖으로 나와 알몸으로 바위에 올라갔다. 아침 바람에 몸이 떨렸다. 공주는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늘 그래왔든 손을 뻗어 나뭇가지에 걸어둔 수건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수건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공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는 나무 뒤에서 물에 젖은 알몸으로 그 자리에 황당하게 서있었다. 분명 언제나 그래왔듯 같은 자리에 수건을 걸어 두었었다.
당황한 공주는 추위에 떨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던 순간 공주는 머리 뒤로 인기척을 느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흐릿한 움직임이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뒤에 한 남자가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심장이 철커덩 내려앉았다.
찰나의 순간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 한 순간에 꿈속에서처럼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내가 공주의 뒤에 다가섰다. 그는 공주를 뒤에서 붙들었고 공주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앙상한 손으로 공주의 입을 막았다. 공주는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내는 더욱 가까이 공주를 조여왔고, 공주는 꿈에서 봤던 그대로 칼끝이 붉게 빛나는 단검을 쥐고 있는 그의 모습을 포착했다. 결국 그녀의 꿈은 경고였다.
칼끝이 공주의 목을 겨눴다. 칼끝을 겨눈 손에 굉장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공주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칼 끝에 그대로 목이 베어 나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숨을 쉬기 위해 애를 쓰는 공주의 두 눈가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공주는 스스로에게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 좀 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어야 했다.
“내 얼굴을 알아보겠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가 앞으로 바짝 다가오자 그에게서 뜨겁고 역겨운 구취가 전해졌다. 그의 얼굴을 살핀 공주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 본 그 남자였다. 한쪽 눈이 없고 흉터를 지닌 바로 그 남자였다.
“알겠어,” 공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주에게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을 알진 못했지만 공주는 그가 집행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층민인 그는 개리스 오빠가 어렸을 때부터 어울리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개리스 오빠의 심복이었다. 개리스 오빠는 누구든지 겁을 주거나 고문을 하거나 죽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를 보냈다.
“당신은 내 오빠가 부리는 개야,” 공주가 공격적으로 사내에게 비아냥거렸다.
사내는 미소를 지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치아가 몇 개 빠져있었다.
“난 그분의 심복이지,” 사내가 대답했다. “네가 나의 경고를 잊지 않도록 무기를 함께 가지고 왔지. 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네가 더 이상 파헤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네가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네게 이 경고를 끝내는 동시에 너의 반반한 얼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칼자국이 새겨져 있을 테니 말이다.”
사내는 으르렁 거리며 칼을 높이 들어 공주의 얼굴을 향해 내리 꽂았다.
“안돼!” 공주가 몸서리를 치며 비명을 외쳤다.
공주는 난도질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칼끝이 공주의 얼굴에 닿기 전에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딘가에서 새의 울음 소리가 들렸고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사내를 향해 순식간에 하강했다. 공주는 찰나의 순간에 새의 정체를 확인했다:
에스토펠레스였다.
에스토펠레스는 발톱을 세우고 빠르게 날아와 사내의 얼굴을 할퀴었다. 덕분에 사내는 손에서 단검을 놓쳤다.
그웬 공주의 뺨에 단검이 꽂힌 순간이었다. 칼끝이 공주의 뺨을 뚫으려던 순간 칼끝의 방향이 바뀌었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놓쳤고 양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웬 공주는 그 순간 하늘에서 반짝이는 하얀 빛을 목격했다. 나뭇가지 위로 태양이 반짝이며 에스토펠레스가 날아갔다. 그 순간 공주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에스토펠레스를 보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